한국일보

심플한 삶

2007-03-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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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지난 주 미중서부에 눈사태가 났다. 신시내티엔 비가 오던 중 기온이 영하 15도로 급격히 떨어져 지상의 모든 것이 두꺼운 비얼음에 싸이고 말았다. 교통이 마비되고, 전선도 마비되어 집집마다 전기가 나갔다. 나무들이 얼음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바람에 한 소녀가 집 앞에서 떨어지는 나뭇가지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우리 대학도 이틀이나 휴강을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출근하면서 오하이오 강을 건너다보니 캔터키 쪽의 언덕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 맑게 반짝이는 수정의 나라 같았다.
사무실에선 모두들 이 신비한 경치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도 심한 눈사태를 몇 번 겪어 봤지만 이번처럼 모든 것이 다이몬드 파편 반짝이듯 찬란해 보인 적은 처음이라 했다. 차는커녕 전력도 없이 이틀을 보낸 우리는 잠깐이었지만 일상의 갖춰진 것들에서 벗어나 맛 본 정신적 신선함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심플하게 살고픈 가를 확인했다.
눈사태가 시작된 날, 한국에 사는 친구 부부가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왔다. 강원도의 그들 농가 앞에서 남편이 무릎 꿇고 앉아 못을 박는 사진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재래식 화장실을 고치는 중이라며 이번 여름에 꼭 놀러 와서 아름답고 조용한 강원도 농가를 즐기라고 했다.
사실 한국문화 체험 중 시골 화장실 체험은 내가 가장 손꼽는 체험 중의 하나다. 1968년 초등학교 학생 때 드라이브인 극장에서 영화 ‘2001년’을 본 적이 있다. 플로이드 박사가 달나라로 가는 우주선에서 ‘무중력 화장실 사용법’이 길게 적힌 포스터를 열심히 읽는 장면을 보면서 33년 후 2001년이 되면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기겠구나 싶었다.
결국 2001년이 되었을 때 나는 우주선은커녕 경기도 이동의 한 시골집 재래식 화장실에 엉거주춤 앉아 ‘재 화장실 쓰는 법’이 그려진 포스터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비 오는 쌀쌀한 밤에 자다 일어나 담장 두른 대문을 나선 후 마침내 들어선 화장실은 제법 커다란 시멘트 건물이었다. 맨흙 땅에 양철지붕이 얹혀 진 그곳엔 창문도 없고 전기불도 없었다. ‘나 홀로 즐기러’ 갔던 여느 곳과 달리 손전등에 비춰진 땅엔 구멍이 없고 한 구석에 재만 높게 쌓여 있었다. 그 옆엔 벽돌 두개가 20센티쯤 떨어져 있고 부삽도 하나 있었다. ‘재 화장실 쓰는 법’ 포스터가 비닐 압축포장 되어 벽돌을 발판 삼아 엉거주춤 앉았을 때의 눈높이에 붙여져 있었다. 선으로 만들어진 사람 모양의 형상이 엉거주춤 앉아 있다가 부삽 질을 하는 과정을 6개로 나눈 그림들이었다.
벽돌을 딛고 일을 본 후 쓰고 난 화장지(잊지 말고 필히 갖고 가야함)를 바로 옆의 화장지 더미 위에 던진다. 부삽으로 높게 쌓인 재를 퍼서 두 벽돌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더미 위에 뿌린다. 재 덮인 더미를 퍼서 한 쪽 구석의 또 다른 작은 잿더미에 던진다. 화장지 더미는 후에 태운다는 것이다. 비료 제조의 자동화라니! 난제의 순간적이고 간단한 해결이었다.
지저분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건조한 그곳에선 나무 태운 재의 강한 냄새 외엔 아무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양철 판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아늑하기조차 했다.
심플하다는 것은 지난 주 어느 날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기사 내용, 20평이 채 못 되는 작은 집들을 의미한다. 단단한 구조 속에 모든 시설이 완벽하면서도 간소한 집들.
우리가 대하는 심플함은 사실 복잡하기 그지없다. 심플한 현대 스타일에 맞추어 새 가구를 소개하는 ‘리얼 심플’ 같은 잡지들에서 권하는 소비성 심플함이 그렇다. 전산학과 수학에서의 심플함은 우수함의 상징이지만 가혹한 노력의 끊임없는 결과에서 비롯된다. 스님이나 퀘이커 교도들의 삶의 심플함은 현실의 복잡한 사회와 비교되어질 때에야 의미를 갖는다.
그렇긴 해도 달나라 가는 우주선 속이건 눈사태가 난 깊은 산 속이건, 우리 모두는 적어도 화장실에서 원시적인 모양새가 되었을 때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가장 심플할 수가 있겠다.

<케빈 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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