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알프스에서 생긴 일

2007-02-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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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뮨헨의 사촌으로부터 1월말 쯤 알프스 산속에 오두막을 빌려 놓을 테니 눈놀이 하러 오라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만해도 우리는 그저 미국 스키장 주변의 산장들을 떠올렸고, 배낭이나 기타 특별한 장비를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웬걸, 그가 빌린 오두막은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산꼭대기 수도원 위에 있었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시간을 낑낑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겨우 내내 눈발 하나 내리지 않았다던 서유럽에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펑펑 쏟아진 눈길 속을 필요한 모든 장비와 식량을 셋이 나누어 짊어지고 가야 했다.
유럽 어디를 가도 수도원은 최고 절경을 자랑하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는 그의 설명대로 정말 경치가 좋았다. 주차장에서 굽이굽이 올라가는 산길은 울창한 숲과 바위와 냇물이 어우러져 조용한 콧노래가 절로 나오게 했는데, 가끔씩 시야가 탁 트이며 건너편 산등성이 사이로 구름이 걸쳐진 산줄기들이 첩첩이 보이면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그러한 산길을 따라 한 시간을 올라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십자가가 달린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그 길을 따라 한 시간을 내려가 집에 가노라면 웬만한 세상사는 다 잊고 그저 신에 대한 경외심만 남을 수밖에 없겠다 싶어 왜 그런 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독일 유수 미술관들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미술가인 사촌은 경치 좋은 곳과 맛있는 식당들을 잘 알뿐 아니라 요리 솜씨도 끝내줬다. 그가 우리 부부를 위해 마련한 특식은 첫날 저녁은 된장찌개였고 그다음엔 김치찌개. 우리는 아마도 이 캐빈이 처음 맡아 보는 김치 냄새일 것이라며 함께 낄낄 거렸다.
독일생활 40년이 넘어 반 독일인이나 다름없는 사촌과, 올해로 미국생활 35년째에 접어들어 누가 반 미국인 이래도 할 말 없을 내가, 알프스 산속의 수도원 윗집에 앉아 김치를 먹으며 나눈 얘기는, 재미 한인인 김진경 총장 주도로 평양에 과학기술 대학이 올 9월 개교한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말했다. “한반도의 맥이 잘려 있는데, 그걸 뚫어줘야 하지 않겠어? 평양에 외부인들이 들어가 학교를 세운다? 거 정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지!” 그는 큰 그림을 보고 필요한 일을 찾고, 미래를 위한 준비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교육만큼 그 모든 것에 부합되는 분야도 없다는 것이다.
독일은 괴테 문화원을 세계 곳곳에 세우고 독일어 교육 위주로 독일 문화 전파를 했었지만 근래에는 세계 문화교류 쪽으로 정책을 바꿔 해외의 괴테 문화원 수를 줄이는 대신 각국의 문화, 예술인들을 독일로 불러들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인데, 단 평양에는 괴테 문화원의 규모를 늘렸다고도 했다. 동서 독 통일을 이룬 나라답게 남보다 좀 앞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컴퓨터와 식품공학, 경영학 과정을 통해 식량난 해결과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위한 준비교육을 한다는 평양과기대의 계획에 우리는 공감하면서 의과대학 등 주민 복지에 직결된 교육도 필요하리란 생각을 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청껏 노래하며 남북한 문제를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우리처럼 해외에 나와 살면서 한 발자국 멀리서 한반도를 바라볼 수 있고, 따라서 좀 더 긴 안목으로 세계사 속에서 한반도의 존재 의미와 한국인의 역할을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평양과기대 같은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이 하얀 눈 속에 파묻힌 알프스 오두막에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김유경> Whole Wide World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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