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여성들끼리 여행을 떠나는 그룹이 많다. 나도 같이 여행을 다니는 그룹이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1년에 한두 번씩 골프 멤버들과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앞두면 처음에는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기다리는 듯 마냥 흥분되어 행복한 방랑자가 된다. 그러다가 막상 여행 날짜가 임박하면 흥분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다. 옷장 정리, 부엌 정리, 패물 정리… 집을 떠나 객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만의 여행을 바람직하지 않게 보기도 한다. 혹시라도 부도덕한 일이 생길까 염려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보면 중년여성들끼리의 여행은 여고시절 수학여행 같은 분위기이다. 여자들끼리 한바탕 재미있게 여행하고 돌아오면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욱 충전되어 새로운 기분으로 일상의 삶을 시작하게 되곤 한다.
여러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이 들어갈수록 부부 중 주로 남편 쪽의 잔소리가 많아진다. 남편들이 마음이 여려지고 어린아이 같아지곤 한단다. 그래서 자녀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내놓고 나면 부부가 365일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보다는 가끔 떨어져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1년에 한두 번 따로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부부가 같이 여행을 가는 것도 물론 좋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여성들은 남편에게 모든 신경이 쓰여서 홀가분하게 여행을 즐길 수가 없다고들 한다. 어쩌다 남편의 표정이 밝지가 않으면 오늘 골프가 잘 안됐나, 혹은 저녁메뉴가 김치찌개 대신 스테이크라서 불만인가… 사사건건 신경이 가는 것이 보통 주부들이다. 이렇게 되면 여자들은 즐거운 여행이 되질 않는다.
지난 달 우리 멤버들의 여행 행선지는 플로리다였다. 이곳저곳을 돌아 마지막으로 키웨스트로 향했다. 끝도 시작도 없이 이어지는 길을 달리다 보니 섬과 다리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코발트와 비취 색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끝없는 바다를 보며 버스 안은 잠시 숙연해졌다. 아마도 모두 동심으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옛사랑을 더듬어 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갑자기 남편 걱정이 되었다. 집을 떠날 때 끓여놓는 곰국으로 식사는 잘 하는지, 긴긴 밤 얼마나 지루할까, 친구들과 저녁식사 하며 음주운전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즐거운 여행이 끝나고, 친구들과 아쉽게 헤어져 돌아온 날. 집안을 둘러보니 별다른 일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순간 한쪽 벽을 돌아보니 웬 검은 빌딩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차곡차곡 쌓인 한국 비디오들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남편이 얼마나 많은 비디오를 빌려다 보았는지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평소 한국 비디오를 즐기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런가 하면 끓여놓은 곰국에는 손도 안 댄 것 같았다. 비디오들만 삼층장을 이루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곰국 대신 비디오로 남편을 위로하며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에바 오> 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