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설날과 고향

2007-02-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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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온 타국에서의 설 맞음은 애뜻한 정념으로 다가온다. 멀리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면서 설날에는 꼭 달려 가리라던 기다림도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내년으로 미루게 되어졌다. 설날은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잠시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성스러움으로 옮겨가는 숙연한 날이기도 하다. 먼저 간 조상과 자손들이 함께 하여 이기적인 평소의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정신적인 유대감을 융합할 수 있는 신성한 날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한편으로 도시생활과 산업화의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현대생활의 강박감과 긴장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간 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다.
이민 생활의 어려움에서도 설날을 맞아 고향으로 달려가는 이웃들이 늘고 있다. 고향은 추억의 끈을 놓치지 않고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기억과 마력 같은 그리움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설날에 음식으로는 어머니가 방앗간을 다녀오시고 난 후부터이다. 흰쌀을 눈가루처럼 하얗게 빻아 흰떡을 해 놓으면 그렇게 좋았고 긴 가래떡처럼 순수하고 장수하라는 새해의 첫 떡국을 들 수 있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이유는 모든 사물이 새로 시작하는 날로 엄숙하고 청결 하여야 하므로 흰 떡을 끓인 떡국을 먹는다 한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의 손은 신비스러웠다. 어머니의 손으로 주물럭거리기만 하면 뭐든지 맛있고 구수했다. 어머니의 손맛에 길들여졌던 식성이 바뀐 지 오래지만 설 명절을 보낼 때마다 뜬금없이 되살아나는 옛 입맛과 어머니의 그 모습은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돼 일렁인다.
고향을 생각 할 때마다 가난한 유년에 세월이 꿈결처럼 떠오른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먼지만 잡히던 막막한 시절 그래서 이다음에 가득 채우리라 마음먹었던 조선무처럼 단단한 어린 마음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도 고향이 좋았다. 두둑이 채워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서 여전히 마음이 허전한 것은 채운 만큼 잃은 게 있어서일 것이다.
가난에서 잠시 도망치는 동안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던 어린 시절의 꿈이 길을 잃지나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설날 아침에 고향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의 음성이라도 듣고 싶다. 팔순이 훨씬 지난 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는 진흙탕처럼 메말라지시고 전화의 음성으로도 들을 수가 없다.
정겨운 목소리 언제쯤에 다시 들을 수 있을지, 설날에는 고향에 그리움에 불을 당겨 따뜻이 지펴야겠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 돌아와 한자리에 모이고 사랑과 은혜로움으로 타오르는 그 마음에 불길은 끄지 말아야겠다. 고향과 아득히 먼 이국땅에서 설날 아침에는 조상의 은공을 마음으로 새기며 차례를 지내고 먼 곳에 머물지만 고향에 어른들께 세배를 올린다. 어머니, 어머니는 고향이십니다.

<안주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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