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멀리 한국 산속의 호머

2007-02-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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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2001년 겨울엔 한국의 외진 산 속에서 돼지머리에게 그리스어를 말하면서 해괴하게 한해를 마무리했다.
안식년을 맞아 서울에서 1년을 살 때 아내 친구의 남편과 가까워졌는데 그가 등산 초대를 했던 것이다. 당시 다소 험한 등산을 즐기곤 했는데, 이 등산은 ‘서울의사협회 산악회’가 한겨울에 산의 정상에 올라 산신제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 했다. 글쎄… 혹시 외국인을 제물로 바치려는가?
내가 대학시절 고대 그리스어를 3년 동안 공부한 것을 아는 그가 산신제에서 호머의 글귀를 읽어 달라고 했다. 당장 호머 책은 없었으나 한 웹사이트에서 기원 전 7세기 호머 시대의 찬양가 ‘만물의 어머니, 대지께’를 찾았다.
당일 버스 다섯 대가 충청북도 광덕산을 향해 출발했다. 12페이지에 달하는 프로그램(물론 수수께끼 같은 그리스어와 외국인 이름이 포함된)이 나눠졌다. 정상에 오른 다음 산 반대편 계곡으로 내려와 제를 지낸 후 점심을 먹는 스케줄이었다. 전 주에 내린 함박눈이 그대로 있어 우린 신발에 아이젠을 단단히 조여 맸다.
내 등산 경험 중 가장 아름다웠던 등산이었다. 올라갈수록 점점 눈이 깊어지고 경사도 심해졌다. 2시간쯤 후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며 장관이 펼쳐졌다. 수많은 앙상한 가지들이 맑은 얼음에 싸여 반짝이고 있었고 멀리 눈 덮인 산들이 지평선까지 몇 마일이나 계속되었다. 섭씨 0도여서 견딜 만큼 따뜻했고 눈의 아름다움이 지속될 만큼 추웠다.
아깝게도 그곳에선 메추리알, 밤, 감귤을 먹는 시간만큼만 쉬었다.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진을 배너 옆에서 찍고 난 후 다시 눈앞의 장관에 넋을 잃고 있는데 대표자가 ‘하산’을 외쳤다. 계곡을 향한 하산은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내려가니 계곡 큰 시냇가 옆엔 제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여자들이 몇 개의 테이블 위에 밥과 김치를 내놓고 있었다. 죽 늘어선 그릴엔 두꺼운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었다. 낮은 제사상엔 금빛 나는 주전자, 무화과 쌓인 은쟁반, 떡, 바나나, 오렌지, 그리고 거무틱틱하고 퉁퉁한 성난 돼지머리가 놓여 있었다.
모두가 돼지머리 앞에 놓인 하늘 색 비닐에 올라선 후 산신제가 시작되었다.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른 다음 절을 했다. 물론 나도 빠지지 않았다. 남자들이 돼지 입에 돈을 꾸겨 넣었다. 단기 4334년으로 시작한 산신제가 드디어 호머의 시간을 맞았다.
나는 마이크 앞으로 나가 고대 그리스와 한국이 공통적으로 산신들을 섬긴 나라였음을 서툰 한국말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시를 읊었다. “에이스 겐 메테라 반돈….”
박수가 쏟아졌다. 다음엔 아내가 나와서 자신이 고어체로 번역한 이 시를 읽었다.
‘만물의 어머니 대지께 바치나이다…”
또 다시 박수들을 쳐주었다.
친절했던 한국 의사들과 수도 없이 종이컵 막걸리를 마신 후 돌아오는 버스에서, 밀려드는 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광덕산에서 호머라니, 너무 허세를 부린 게 아니었을까?
1980년대에 김대중씨의 옥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기초 서양사 강의에서 듣고 또 듣는 유명 철학가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었다. 마치 ‘구찌’와 ‘프라다’ 상표라도 되는 듯. 그것 또한 허세가 아니었을까?
그 해 탈레반이 불교를 말살한다며 아프칸 산 속에서 수많은 부처상을 폭파하여 전 세계인들을 분노에 떨게 한 일이 생각났다. 아니다, 허세가 아니었다. 우리의 과거는 오랜 시간 속에 묻혀버린, 손에 닳을 듯 말듯 신비하게 감춰진 아름다운 복합체이면서도 그 나름대로는 독창성이 있는 단일 개체로서 보존되어져야 할 것이다.

<케빈 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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