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허락 해 주세요, 아빠!

2007-02-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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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휴가 차 아이다호 공군기지에서 돌아 온 딸애의 군인다운 용모는 해를 거듭 할수록 더 하다. 보얗던 솜털이 말끔히 가셨다. 군영을 떠나면 긴장이 풀릴 만도 한데 새벽이면 어김없이 한 시간가량 뛰는 강인한 체력으로 이라크 파병의 극한 상황을 이겨 냈나 보다.
딸애가 성탄절 휴가일정을 통고 해 오자 아내는 직장의 피로를 말끔히 잊은 듯 딸애를 맞을 준비에 부산스럽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모성애가 가슴에 와 닿는다.
평소와 달리 싱글거리는 아들놈의 태도가 어쩐지 수상쩍어 보였으나 ‘싱거운 놈’ 정도로 지나쳐 버리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다. 아내는 아들놈에게 성화를 부렸다. “혜리가 정확히 언제 쯤 오나 전화 좀 해 보렴,” “아직 날짜가 멀었잖아요!” 귀찮다는 아들놈 말대꾸에 시그러진 아내는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막 수저를 들려는 참이었다.
“잠깐만!”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아들놈은 불문곡절 우리 등을 밀어 안방에 세우더니 번갈아 심상찮은 질문을 했다. “지금 소원을 말해보세요” 엉겁결에 아내는 “그래, 돈이나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작 아들놈이 시도했던 “혜리를 만나보고 싶다”와는 얼마나 달랐든지...
그러자 아들놈은 태연히 “자, 안방에서 누가 나오는지 잘 보세요”라고 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아내는 화들짝 놀라 기절할 듯 소리쳤다. “아니 이게 꿈이야! 네가 어찌 거기서...,” 흡사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듯 우리에게 다가선 딸애의 모습에 모두 놀랐다.
오빠와 사전 모의한 딸애는 앞 당겨진 휴가일정을 속이고 친구들이 공항에서 집에 데려 온 후 안방 창문으로 잠입, 침대 밑에 숨어 아들놈의 유도심문에 걸린 엄마의 돈타령을 엿 들었다.
“아빠는 제일 좋은 내 친구에요” 이렇듯 격의 없던 딸애였기에 이번에도 쉽게 내비칠 수 없는 이성 관계를 서슴없이 꺼냈다. “아빠! 같은 부대 백인동료와 사귀고 있어요... 결혼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호감이 가요.” 시종 굳은 표정을 읽으며 딸애는 움츠렸다. “허락 해 주세요, 아빠...” 평시 한국 남자를 배필로 맞아야 한다는 나의 완고한 혈통주의 성향을 설득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딸애는 끝내 반응 없는 내 앞에 마지막 카드를 내 놓았다. “내 뜻대로 하면... 그때 아빠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단호한 어조는 궁지에 몰린 고양이 앞에 쥐를 연상시켰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서로 다른 인생길로 갈라설 수밖에…” 더 이상 허락을 받아 낼 수 없다고 여긴 딸애의 하염없는 눈물이 내 가슴으로 번져 왔다.
오는 9월 이라크 2차 파병으로 선발된 딸애가 휴가 오며 기대했던 가장 다정한 친구 아버지의 넓은 도량이 한낱 폐쇄적 인종 갈등의 늪에 묻히고 말았다. 애초 애들을 미국 땅으로 이민시킨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만이 구닥다리로 남아있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나를 꼭 껴안던 딸애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빠! 술 조금마시고 오래 살아야 해” 뒤 돌아 공항출구로 사라지는 딸애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혜리야! 미안해…” 그렇게 혜리 아버지는 나쁜 사람으로 LA 겨울바람 앞에 섰다.

김탁제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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