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머문 그리움

2006-10-23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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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미연

스산한 바람에 바스락거리며 뒹구는 낙엽들, 10월의 하루하루도 어느덧 수명을 다해간다. 작년 가을, 90의 긴 세월을 함께 하시다 홀연히 먼 길을 떠나신 나의 시 어머니, 어머니 영전에 큰 절 한번 올리지 못한 불효의 막내며느리이기에 다시 맞는 이 가을은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
길가의 어느 집 담장 밑에 나비가 앉은 듯한 하얀 꽃잎으로 지난 여름동안 피웠던 단아한 난 꽃도 이제는 떡잎져 흐트러진 이름 모를 들풀로 변해 세월을 재촉하고 있다.

그 거리를 지날 때 마다 생전에 어머니께서 좋아 하셨던 난 이라며 애써 쓸쓸함을 감추곤 했던 아이 아빠를 위해 예쁜 화분에 담아 집안으로 들여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에선 화분에서 피어낸 꽃으로만 볼 수 있는 난을 이곳에서 들꽃처럼 흔히 만날 수 있어 참 좋다.

미국에 들어오기 며칠 앞둔 어느 무더운 여름날,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큰 형님 댁에 살고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인자하신 모습으로 반가이 아 주시며, 어서오너라 이 더위에 웬 일이냐? 손수 냉장고에서 수박을 잘라 주시며 어린 손자를 가슴에 안아보고 행복해 하셨던 어머니께선 미국에 가거든 좋은 구경 많이 하고 아이 잘 키워라. 그리고 내가 죽어도 먼 길을 올 생각 말아라 하시며 굳이 마다하는 우리를 따라 나오셔 동네 금은방에 들러 주섬주섬 속 고쟁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아이 돌 반지 한 돈을 사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던 어머니 떠나는 우리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셨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미국에 들어와 살면서 고령의 어머니께서 너무나 건장하셨기에 연락도 자주 못 드렸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때늦은 후회로움으로 남는다.


어머니께서는 한의사이셨던 시 아버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7남매를 홀로 키우시느라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탓인지 별로 말씀이 없으신 분으로 내색은 안하셨지만 막내며느리로 들어온 나를 막내딸처럼 아끼셨던 것 같다. 90이 다 되신 연세에도 꼭두새벽 서울에서 양수리까지 버스를 3번 갈아타고 한걸음에 달려오셔 지고 오신 배낭 속에서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을 꺼내 놓으시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텃밭에 나가 일 하시다 서둘러 서울에 가시곤 하셨다. 어쩌다, 한두 번 중미산 구경을 시켜드리면 나들이 가는 어린아이 마냥 즐거워하시며, 이 차를 타고 한없이 가고 싶으시다던 어머니께 여행 한번 제대로 시켜 드리지 못함이 죄스럽기만 하다.

어느날, 동대문 시장에서 무명 삼베를 끊어와 손수 당신의 수의를 만드시는 모습을 보고 언짢아하는 우리에게 마지막 가는 날 입고 갈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아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며 환하게 웃으셨던 어머니, 낙엽은? 초연히 흩어지지만/ 어머니의 모습 아련히 머문 그리움/ 고인 정겨움/ 젖어 오는 후회/ 못내 목이 메어 두 눈을 감고/ 마음만은 어머니 곁에 머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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