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이프웨이에서 생긴 일

2006-10-1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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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생각하며

▶ 권죽순/락빌, MD

직장을 은퇴하고 이곳 미국에 이주한지 벌써 2년이 넘었다. 미국 정부를 위해서 3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은퇴하니 그 공로(?)로 미 국무성으로부터 미국에 와서 살 수 있는 영주권이 나와서 얼떨결에 겁도 없이 짐 싸들고 미국으로 온 것이다.
델라웨어 베다니 비치에 있는 친구 별장으로 가기로 하고 집 근처 세이프웨이에 들러 과일과 즉시 먹을 수 있게 잘 정리된 야채들을 주워 담고 계산까지 잘 마친 다음, 일단 출발장소인 버지니아로 향하기 위하여 바로 옆 개스 스테이션에 들렀다. 개스를 넣으려고 지갑을 찾으니 검은색 나의 지갑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가슴은 쿵덕쿵덕 머리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으로 급히 세이프웨이 카운터에 달려가서, 내 지갑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계산하여준 예쁘장한 캐시어에게 물으니 모른다고 하면서, 커스터머 서비스 쪽으로 가서 여기 저기 서랍도 열어보고 찾아보더니 없다고 전화번호를 남겨놓으라고 한다.
미국은 신의의 나라이고 정직한 나라라고 늘 듣고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반드시 지갑은 되돌아 올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돈은 빼고라도 중요한 증명서 등을 돌려주었으면 하는 기대로 매일 우편함을 열심히 체크하였으나 소식이 없다.
일주일을 기다리다가 우선 급한 운전 면허증을 다시 신청했다. 대충 불편한 일들이 해결되었으나 아직도 은행의 새 크레딧 카드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일주일 지난 어느 날 지갑을 잊어버리고 나서 처음 세이프웨이에 들렀다. 커스터머 센터에 한번 물어나 보자고 별 기대 없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그 쪽으로 옮겨 직원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혹시 내 지갑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지 않은가 물었더니, 그 직원은 지갑이 무슨 색깔이지? 하고 묻는 것이다. 검은 색이라고 대답을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검은색 지갑을 들고 나오면서 이것이냐고 묻는다. 내가 가지고 있었을 때보다 더 불룩 한 것 같은, 그 낯설게 보이는 지갑을 한참 멍하니 쳐다보다가, 일단 받아서 안을 확인하였다. 그 안에는 나의 사진이 보이는 운전면허증과 캐시카드 그리고 현금까지 모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 미국에 이주하여 2년 여 동안, 아직은 이곳 생활이 불편하고, 한국이 그립고, 이곳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어렵게 적응하느라고 애를 써 왔다. 그런데 지갑을 고스란히 되찾은 그 일로 인해서 미국인의 정직한 시민의식과 말로만 듣고 있었던 신의의 나라 미국을 내가 체험한 것이다. 이제부터 하나둘씩 미국의 좋은 점이 나의 눈을 뜨게 하고 미국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권죽순/락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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