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내려오면서 본 매킨리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에델바이스 산악회 원정대 유재일 대원
운무에 싸인 정상, 아무것도 볼수 없었다
Day20
2006년 6월 14일
온 사방을 헤매며 앞에서 사라져버린 팀들을 찾는다. 한참 후 내 뒤로 한 팀이 올라온다.
이제는 그들을 놓치지 않고 바짝 뒤쫓아가니 편평한 넓은 곳에서 앞에서 올라갔던 두 팀이 쉬고 있다(내려오면서 보니 이곳이 풋볼 필드다).
나는 이곳에서 뭍으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리며 헉헉하며 크고 깊게 숨을 쉰다. 낮은 기압과 적은 산소 속에서도 이렇게 숨을 쉬니 조금 더 산소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50도 이상의 설 사면을 치고 올라간다. 나는 맨 뒤에 서서 이들의 뒤를 바짝 쫓아서 올라갔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면 결코 정상에 설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뒤를 쫓아서 능선 안부에 올라서니 이제는 칼날 같이 좁은 리지 위를 걸어야 했다. 나는 얼른 트레킹 폴을 꺼내 양쪽으로 중심을 잡으며 뒤쫓아갔다. 이 칼날 능선의 중심선을 걸으며 이곳에서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그걸로 모든 게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이나, 두렵고 무서워 소름이 돋는다.
나이프 리지에는 눈이 살짝 덮여 있었고 그 눈 속엔 반들거리는 얼음이 숨어 있었다. 매킨리 산을 흩고 치솟은 바람이 만들어 놓은 리지는 어느 순간이든 중심을 잃으면 보이지 않는 끝없는 빙벽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발로 땅을 딛고 서있다는 것이 기쁨인 줄 모른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아 고마운 것을 모르는 것처럼 어느 곳으로 미끄러질지 모르는 빙벽 얼음 위를 걸으며 서걱거리는 클렘폰 소리를 들으며 산소가 모자라 터질 듯 헐떡거리는 내 심장의 목마름도 모를 것이다.
자기 속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며 올라가는 행위에서 희열을 느끼는 인간을 데날리는 거부하지 않고 너그럽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마치 넓고 아늑한 품으로 정서불안의 어린이를 감싸 안아주는 어머니의 그 깊은 사랑처럼 푸근하게… 위험한 나이프 리지가 끝이 나고 작은 언덕 위를 오르자 앞에서 가던 팀들이 배낭을 내려놓아 여기서 쉬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서는 사진을 찍는다.
아! 이곳이 정상이구나! 하며(18:01) 정상 아래쪽을 내려다보지만 완전히 운무에 가려 전혀 조망을 즐길 수가 없는 상태이다.
그야말로 ‘운무에 가려진 신비스런 하늘 길’이었다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본다.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보다는 아직 살아 있어서 희박한 공기를 마시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 이곳이 정상이구나! 9시간 동안 힘들게 올라온 정상에서 사진을 찍었다.>
칼날능선 타고 9시간, 정상서자 벅찬 감회
정상서 25분… 비행기시간 맞춰 밤새 하산
누가 말했던가. 아는 만큼 느낀다고, 지난 겨울동안 땀을 흘리며 훈련을 했던 대원들과 에델바이스 산악회 회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동안 오르내린 산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바라보는 감회는 벅차고도 남음이 있다.
9시간 동안 힘들게 올라온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아쉬운 작별을 하며 산을 내려온다.(18:26) 올라갈 때 만들어진 눈 위의 발자국이 몹시도 반갑다. 다시 칼날 같은 리지로 내려서니 트래픽이다. 내 뒤에서 올라오던 팀들이 줄지어서 리지를 건너오기 때문이다.
한참 후 광활함 풋볼 필드에 도착하니(19:32) 구름이 걷히고 눈부신 태양이 설 사면에 반사되고 있었다. 풋볼필드에서 내가 지나온 데날리 리지에 까맣게 사람들이 줄지어서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니 그 동안 품어왔던 격한 감동과 눈물이 고글 밑으로 타고 흐른다.
이곳에서 간식을 먹고 앞장서서 가는 팀을 따라 데날리 패스에 도착(20:27) 파워 젤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하이캠프로 향한다.
하이캠프에 도착하니(22:02) 하이캠프는 매킨리 시티를 옮겨다 놓은 듯 각양각색의 수많은 텐트들이 쳐져 있었고, 딸내미들은 축하한다며 안아준다.
나는 텐트를 걷고 다시 매킨리 시티로 하산을 한다.(22:47) 체력소모로 바로 하산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준해형과 6월16일 자정 0시5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밤새도록 하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랜딩 포인트는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의 갈림길이 만나는 터미널이었다.>
2006년 6월 15일
자정이 넘었는데도 해가 하늘 끝에 걸려 환하게 비추는 바람마저도 멈춘 이 곳은 절대 고요였고 절대 정적만이 흐른다. 가끔 그 고요를 깨우는 눈사태 소리와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만 들린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감보다는 참으로 고요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삶과 죽음이 곧 하나임을 깨달았음인가? 고맙게도 자정이 넘었는데도 해는 지지도 않고 나를 비쳐주고 있다. 눈부시도록 환한 태양을 보며 조심! 조심해야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한발 한발씩 내딛는다.
내려가는 것이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기에 얼마나 많은 산악인들이 하산 길에 매킨리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조심조심 발을 옮기며 내려간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황홀한 풍경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산을 재촉했다.
검은 하늘 가운데 떠있는 태양의 빛이 눈이 부시다. 태양의 강렬한 빛으로 보면 지금 이 추위는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생사를 가르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건 정말 기가 막힌 풍경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아픔 끝에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