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복숭아 연정

2005-08-11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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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연<한국학교 교사>

양손으로 받쳐 들어도 감당 못할 복숭아 껍질을 손으로 솔솔 벗기면 뽀얀 속살이 향기를 뿜으며 시각과 미각을 자극한다.
기다렸다는 듯 껍질 벗겨 썰어 놓기 무섭게 후다닥 집어 가지만, 나는 손과 입이 가려워 안절 부절이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동네 처음 생긴 복숭아 과수원에 복숭아가 엄청 많이 열렸다고 아이들이 말했다.
사찰 앞 냇가에서 멱을 감고 어두워지길 기다리다가, 보살님이 들어 가면 복숭아 서리를 하자고 사전 모의를 단단히 했다.
그날은 꼭 운동회 때 입는 펑퍼짐한 하늘색 나이론 팬티를 입어야 한다고 명령을 받았다.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멱을 감으며 아이들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각 사각 먹을 복숭아를 생각하면서 신이나게.
워이 워이, 오늘따라 왜 이리 동네 애들이 시끄럽게 구냐고 보살은 고래 고래 소리 지른다.
달빛 없는 날 밤, 열심히 따서 팬티 속에 집어 넣는데 어린 복숭아 나뭇가지 찌지직, 쿠~웅, 걸음아 날 살려라. 허부적 허부적 넓은 길 놔두고 왜 물속으로 뛰어 들어 도망을 가는지.
나이론 팬티 속에서 물과 만난 설 익은 복숭아들, 온몸 (특히 팬티속)은 복숭아 털로 인해 우둘 두둘 벌겋게 불어나서 가렵고 화끈거리고.
그때부터 복숭아란 글자를 읽기만 해도 입과 눈과 손, 온몸이 가렵기 시작해져 일명 복숭아 알레르기란 병이 생겼다.


식구들이 모두 복숭아를 좋아했다. 특히 껍질 솔솔 벗겨지는 백도를.
음~, 이 맛있는 복숭아, 우리끼리 사이 좋게 먹자. 누구만 빼놓고, 달밤에 복숭아를 먹다가 복숭아 벌레까지 먹으면 진짜 예뻐진데, 누구는 복숭아 못 먹어서 어쩌니, 차별화 된 식성으로 느끼는 외로움.
며칠 전, 남편이 복숭아를 사왔다.
나 때문에 털 없는 천도를 사왔다고 했지만, 각 자 알아서 먹고 싶을 때 챙겨 먹으라고 했는데, 벌써 물렁 거려진다. 버려 질 까봐 아까와서 씻는데 껍질이 솔 솔 벗겨지면서 냄새가 나를 유혹한다.
참지 못해 냉큼 한 입 떼니 제법 맛있네. 어? 입도 괜찮으네.
눈 깜짝 할 사이 한 개 해결하는데, 하지마, 내가 할께, 안 돼, 엄마 손 불어 터, 어떡해.
괜찮다고 고백을 해야 하나!
엄마란 체면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차별화 된 식성을 고수 해야 하나!
껍질 벗겨진 뽀얀 속 살, 그윽한 향을 내는 말랄 말랑한 복숭아가 이 여름에 나를 유혹하는데 나의 체면과 권위가 어깨를 바짝 추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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