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 호
영국은 각자가 임무를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불멸의 메시지 남겨
신화남긴 ‘넬슨 터치’
영국 국민들이 전설에 가까우리만큼 받드는 영웅은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다. 그의 일생은 여자 관계만 빼놓으면 한국의 이순신 장군과 비슷하다. 높이가 58미터나 되는 넬슨 탑과 동상은 런던의 최고 번화가인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져 있다. 런던의 동서남북 좌표와 주소는 이 트라팔가 광장을 중심으로 표시된다.
같은 시대에 산 웰링턴경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물리쳤지만 그는 나중에 수상에 오른 다음 아집의 정치를 펴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잃었다. 우선 넬슨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숨졌다는 점에서 그와는 다르다. 그뿐만이 아니다. 넬슨은 세인트 빈센트 전투(1797)에서 부하들을 진두지휘, 적의 배에 올라 육박전을 벌이다 한쪽 눈을 잃었는가 하면 테네리페 전투에서는 오른 팔을 잃었다. 애꾸눈에 외팔이 제독이 된 그는 재혼과 동시 은퇴했으나 나폴레옹이 영국을 침공하려하자 기꺼이 군복무 재소집에 응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이 시작된 그 즈음 영국은 용장인 그를 절대로 필요로 했었다.
넬슨의 작전은 특이했다. ‘넬슨 터치’로 불리는 이 전술은 적 함대의 가운데를 뚫고 들어가 상대방을 분열시킨 다음 궤멸시키는 것으로 장병들이 일치단합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공격방법이었다. 넬슨은 부하를 자기 몸처럼 돌보고 사랑해 그가 나타나는 것 자체만으로 영국군은 사기충천했다.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기함 ‘빅토리’호(사진)로부터 부하들에게 내린 메시지는 두고두고 영국인의 정신훈화로 물려져 내려오고 있다. “영국은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
평범하지만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영국식 표현이다. 당시는 무전이 없어 깃발수화로 각 함정에 전달했다. 트라팔가는 스페인 남부해협으로 프랑스 연합함대 33척, 영국함대 27척이 이 곳에 집결해 세기의 대해전을 벌였다. 영국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프랑스 병사의 저격에 사령관인 넬슨 제독(47세)을 잃는 비운을 당했다. 트라팔가 해전(1805)을 계기로 영국은 대서양과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다를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다시는 꿈꾸지 않게 되었다.
넬슨은 주나폴리 영국대사 해밀턴경의 부인 엠마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부인과 이혼했다. 그는 작전회의실 벽에 엠마의 사진을 걸어 놓을 정도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트라팔가 전투만 끝나면 런던 교외에서 그녀와 여생을 보내겠다고 약속 했으나 그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47세를 일기로 숨졌다. 12세에 갑판 사병으로 시작해 제독에까지 오른 호레이쇼 넬슨 - 그는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군인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트라팔가 대첩’ 200주년을 맞아 영국에서는 지금 각종 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그가 전사한 10월21일을 전후해 피크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넬슨 제독
넬슨이 열렬히 사랑한 엠마부인.
넬슨의 6대손인 브랫 넬슨(왼쪽)과 크레이그 넬슨. 모두 영국 해병대에 근무하고 있다. <자료사진>
트라팔가 해전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역사학자 네일러교수가 넬슨으로 분장해 빅토리함에 오르고 있다.
넬슨이 타고있던 기함 ‘빅토리’의 작전 회의실 내부. 넬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난달부터 런던 해양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넬슨-나폴레옹 특별전시회 포스터.
200년전인 1805년 런던 성바오로 성당에서 거행된 넬슨 장례식. 왕에서부터 시민에 이르기까지 런던시민 수십만명이 참석했으며 장례식 인파로는 지금까지 기록을 세우고 있다. 당시에는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궁정화가가 그린 그림이다.
이철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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