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갤러리 끌로드 모네 작 ‘수련’
2005-07-22 (금)
캔버스로 옮긴 ‘자연 사랑’
때로 가까이 있다는 건 그것이 아무리 세상사람 모두가 경탄해 마지않는 것일지라도 손 뻗으면 닿는 아내처럼 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심드렁하게 만든다. LACMA에 걸려있는 끌로드 오스카 모네(Claude Oscar Monet, 프랑스, 1840-1926)의 ‘수련’(Nympheas, 1897-1898)이 그렇다. 가로 41인치, 세로 26인치의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오르세이, 루브르에 가서도 대하기 힘든 명작이건만 가까이 있어 늘 볼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마냥 게으르기만 하다.
어린 시절부터 통제 불능할 정도의 자유혼이었던 모네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바다가 태양빛을 받아 부서질 무렵이면 그 아름다운 빛의 마법을 눈에 들여놓기 위해, 들로 산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그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화가, 부뎅은 그에게 하늘과 바다, 사람, 나무, 자연 등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참 모습을 느낌 그대로 그릴 것을 권유한 존재다. 부뎅으로 인해 모네는 예술에의 심미안이 열리고 자연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는 피사로, 르누아르, 시실리, 마네, 세잔, 드가, 에밀 졸라 등 새로운 화풍과 사상을 추구하는 아티스트들과 친하게 지낸다. 삶과 예술에 대해 밤새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예술혼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은 각자 다르면서도 같은 방향을 추구해가는 동지들에게 서로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예술 공동체를 만들어나갔다.
43세 때인 1883년, 모네는 지베르니라는 인구 300명 규모의 작은 마을에 널찍한 농가를 세얻어 여자 친구 알리스,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알리의 6남매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헥타르에 달하는 뜰에는 채소밭, 과수원, 정원이 있었다. “여보게, 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고 싶다네.” 당시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자주 발견됐다.
7년 뒤, 그는 바라던 대로 임대해 살던 이 집을 사들여 정성껏 단장한다. 집 앞의 정원에는 10만여송이 색색의 꽃을 심었고 연못을 판 후 잉어도 놀게 하며 수련도 둥둥 띄웠다. 처음에는 지베르니의 풍경도 곧잘 그리던 모네는 점차 자기 집의 정원과 수련, 일본식 교각만을 반복해서 화폭에 담게 된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바로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1916년부터 10년 동안은 대형 캔버스에 오직 하나의 오브제, 워터 릴리만을 그렸다.
초기와는 달리 1860년 이후, 모네는 밝은 색채의 팔레트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림자에조차 검정을 쓰지 않았던 모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는 모네의 관에 까만 천이 둘러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니, 안 돼. 모네에게 검정이라니. 안 될 일이야.” 그는 검은 천을 떼어내고 꼭 그의 캔버스 같은 꽃무늬 헝겊을 덮었다고 한다.
화가에게 있어 시력장애는 작곡가에게 있어서의 청각장애만큼 치명적이다. 1907년, 67세가 된 모네는 서서히 시력을 잃기 시작한다. 눈으로 본 그대로 그림을 그려왔던 그였지만 시력이 나빠진 이후에는 빨강과 노랑이 화폭의 대부분을 장식했고 파랑은 빛을 감추게 됐다. 표현의 세세함도 사라져갔다. 1926년 12월 5일,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모네는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땅, 지베르니의 묘지에 묻힌다.
그의 작품은 최근까지도 계속되는 세계 유명 뮤지엄의 전시 소재다. 올해 2월, 취리히의 스위스 쿤스트하우스에서는 ‘모네의 정원’이란 제목의 특별전시가 있었다. 지금 현재도 스코틀랜드 켈빈그로브에서는 ‘모네와 인상파화가들’이란 제목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LACMA에는 또 다른 모네의 그림들이 4점 더 전시돼 있고 노턴 사이먼 뮤지엄, 게티 뮤지엄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박지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