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환경 에세이/계림(桂林)의 산수

2005-07-01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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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서안에서 한낮에 뜬 비행기가 저녁 어스름이 되어서야 계림에 닿는다. 4천리 길은 족히 되는 듯 싶다. 속세를 떠나 송나라 곽희의 산수도(山水圖)에 몸을 던지듯 계림에 빠져든다. 중국 서남단의 광서(廣西)성. 북경에서 워낙 먼 오지여서 1600년 중엽엔 명조가 만주족을 피해 피난오기도 했고, 장개석 정부가 마지막까지 잔류하던 곳이라고 했다. 계림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 산하(山河)가 사람 무리보다 승(勝)함을 느낀다.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진다.

북경과 시안에선 인간이 만든 위대한 조형미를 보았다. 그러나 계림에서는 하늘이 내린 산과 물의 자연미를 본다. 무릉도원에 비기는 게 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강은 초록 비단 폭 같고 구릉은 청록색 옥(玉)빗처럼 솟았어라. 당나라 시인 한유가 칭송한 계림의 산수. 그 시구를 동승(童僧)이 독경하듯 되뇌어 본다.

계림의 산수미(山水美)는 동골동골 첩첩이 솟아오른 구릉과 맑은 강물, 깊고 신비한 동굴과 기암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이런 완벽한 동양적 구릉들을 세상 어디서 볼 수 있으랴? 3억 년 전, 바다 밑에서 솟은 거대한 석회암반을 하늘이 비바람의 조각칼로 깎고 다듬어 놓은 것이다.


절경(絶景)은 조화미에서 나온다고 했다. 계림이 천하 절경인 것이 산과 물도 빼어나지만, 그 산수를 함께 아우르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기 때문임을 실감한다. 그것은 안개구름이었다. 물에서 피어난 운무(雲霧)는 부드러운 비단결처럼, 은은한 퉁소소리처럼, 구릉과 계곡을 휘감아 돌며 손수 묵화를 그리고 있다. 정물(靜物)인 산수가 물안개의 흐름을 따라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이 된다. 자연이 켜는 협주곡의 화음이 계곡에서 산마루로, 다시 강변으로 여운을 남기며 흘러간다.

우리 일행은 장강(長江)의 지류인 리(離)강에 배를 띄웠다. 그리고 장장 4시간 여를 첩첩 구릉들의 비경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길잡이 친구가 계림 땅의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천신(天神)이 수천 산과 구릉들을 남해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용왕을 이기기 위해서였지요. 천신은 여신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단단한 채찍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왕을 보좌하는 상어낭자가 그 채찍을 훔쳐 달아났지요. 천신은 산을 몰 수 없게되고, 구릉들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남아 이런 경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 이 전설은 무슨 암시인가? 남자들이란 일만 벌여놓을 뿐, 역사의 마무리는 결국 여자들의 몫이라는 은유인가?

유람선 곁으로 한 노인이 대나무 뗏목을 타고 천천히 지나간다. 어깨에 걸린 긴 죽장엔 부리가 긴 검은 새 두 마리가 노끈에 묶여 앉아있다. 펠리칸 보단 작고 청둥오리보다는 크다. 말로만 듣던 고기잡이 코모란(cormorant) 새다. 목을 끈으로 조여 송사리는 삼키고 큰 고기는 주인에게 토해놓는다고 한다. 천년동안 내려온 고기잡이 법이다. 그러나 요즘은 미물을 학대한다고 반대가 심해 관광객들 앞에서 묘기나 부린다고 했다.

나는 이 노인과 코모란을 사진에 담으려고 허둥대다가 아차 안경을 놓치고 말았다. 강물 속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은테 안경을 보고도 어쩌질 못한다. 길림의 절경에 반해 아예 이곳에 살겠다고 강으로 뛰어든 내 분신(分身)같은 생각이 들어 반 체념을 한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안경이라 아쉽다. 옆에 섰던 아내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계림에 정만 두고 가는 게 서운해 심안(心眼)도 놓고 가니 복인 줄 아세요.

계림 선창에 내려 달을 쳐다보다가 오늘이 보름인 줄 알았다. 쟁반 같은 달, 강변 길을 따라 숙소로 향하다가 문득 맡은 친숙한 내음. 아! 계피 향이다. 그제야 둘러보니 보름달 속에나 있을 계수(桂樹)나무들이 버들과 함께 늘어 서있다. 아하! 그래서 계림인 것을.... 새삼 무릎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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