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고물 차, 탱크 차

2005-06-20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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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진<주부>

저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려 온다. 설마 ---.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차고, 헉헉거리며 뛰고 있지만 쉴 수가 없다. 두고 온 차를 생각하면---.

요즘 들어 부쩍 차가 말썽을 부리고 있었다. 지난번엔 시동이 걸리지 않아 거라지에 가서 수리를 하고 왔는데 또 서다니---. 이번엔 아주 확실하게 길 한 복판에서 섰다. 게다가 좌회전 차선의 맨 앞에서. 시동을 다시 걸어 볼려고 한번 두번, 하지만 묵묵 부답이다. 뒤에선 짧은 좌회전 신호에 출발을 하지 않는 차를 앞에 두고 일렬로 들어선 차들이 몇 번씩 빵빵거리더니 옆 차선으로 돌아 나가기 시작 했다. 잠시 동안 생각을 했다.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이 한적한 곳에는 상점도 하나 없고, 다행히 집 가까이에 와 있었던지라 차는 비상등을 켜 놓고 뛰기 시작 했다. 그래, 1 마일 정도만 가면 아는 집이 있다.

마침내 전화를 해 견인차를 부탁 해 놓고 친구의 차로 다시 현장에 돌아 와 보니, 거기엔 벌써 소방차, 경찰차, 견인차가 먼저 도착 해 있었고, 이 정체 불명의 차를 검색 하고 있는 듯 했다. 짧은 영어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불쌍한 동양 여자를 지켜보던 경찰관이 오히려 고맙게도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고 떠났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이 해프닝은 오래 전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의 무모한 용기덕분에 생긴 일이었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아직 정보도 불충분하고, 무엇을 구입하든지 궁색했던 터라 십년도 넘은 이 미국 차를 싸다는 이유 하나로 덥썩 구입했으니, 이런 저런 이유로 거라지를 하루가 멀다하고 들랑 달랑했던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커다란 6기통의 고물차에 올라, 창문을 활짝 열고 문 루프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체사픽 브릿지를 지나 윌리엄스버그까지, 스카이웨이를 타고 워싱턴을 지나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저지, 뉴욕까지, 동부의 도시들을 누비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며칠 전 또, 누가 새 차를 살짝 긁어 놓았다. 아이 학교 주차장에서 누군가 차를 빼다 뒷쪽 트렁크를 보기 흉하게 찌그러트리고 도망가 바디 샵에 갔다 온지 얼마 안되어 그런지 이젠 조그만 긁힘에도 기분 나빠지고 상처 받는다. 요즘 들어서는 원래부터 찌그러져 있고 약간의 긁힘은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던 그 추억의 탱크 차가 더 편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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