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팔 불 출

2004-12-03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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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진<주부>

어려운 결정 후에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미지의 나라로 이민을 와서 딸 아이가 초등학교 일 학년에 입학했다.
아침 다섯시 삼십분에 튕기듯 일어나서 하루종일 팽그라미 같이 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안해보던 일과, 처음 대하는 서양 사람들의 우리와는 다른 시선에 당황하고, 서투른 영어에 주눅들고, 보고싶은 사람들과의 어마어마한 거리감 으로 내안에 정서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일에 과잉반응 을 보이고, 심한 기억 감퇴증에 시달리며, 하루 하루가 급류에 떠내려가는 가랑잎 같이 숨 가쁘고 절박했다.
어느 날 딸아이를 옆에 태우고 운전을 하는데, 앞차에 팔십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갈듯 말듯, 차선을 바꿀 듯 말듯, 바빠서 허둥거리는 내 속을 태워서 짜증을 내는 나에게 딸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엄마도 늙으면 그럴텐데… 작고 동그란 얼굴, 침착하고도 맑은 눈을 보며 정신이 번쩍 나게 부끄러웠다.

이 세의 교육을 위해, 마음껏 뻗어나갈 그들의 장래를 위해 이민을 감행한 부모들은 그 애들이 무언가 뚜렷한 존재로 한이 많은 이 땅에 우뚝 서기를 바란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세기에 남을 발레리나, 격조 있는 학자, 뭐라도 되기를 갈망하며 정신없이 덤비는 내 광기의 에너지가 그 애에게 전달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조심스럽게 엄마, 난 그렇게 해서 내 라이프가 없어지는게 싫어. 말투는 아이였지만 내용은 의미심장해서 또 한번 내가 할 말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부모의 역량에 맞추어 이세를 주시는가 보다.
덤벙대고, 무계획하고, 쓸데없이 감상적인 어미에게, 참을성 있고, 영특하고, 지혜로운 아이를 주신것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도록 사지와 오감을 주시는 은혜와 같은 이치가 아닐까? 사막에 덜렁 놓여진 미물같이, 방향도 갈피도 못잡고 허둥거리는 내게 뚜렷한 오감으로 그 어려운 날들을 지탱하게 해준 하나님의 선물. 지금도 수시로 나를 부끄럽고 무참하게 만드는 이 아이는 내 삶의 나침반이다.
평범이 최상이라는 진리를 내게 깨우쳐준 아이, 담담한 눈으로 그러나 발랄하게 자기둘레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고 어떤 난제에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는 아이, 언제나 남을 배려하고 주위를 배려 하지만, 신념이 확고해서 좀처럼 자기 의지를 굽히지 않는 아이.
나는 자꾸만 행복한 팔불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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