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어떤 여자

2004-11-26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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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옥<수필가>

십 년 넘게 이웃에서 일가친척 같이 지낸 여자가 있었다.
거의 매일 보거나, 전화로 목소리를 듣지 않고 넘기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삼십분 운전을 해야하는 한국시장 이라든지, 혹은 큰맘먹고 한 두시간씩 운전을 해야 갈 수 있는 아울렛 매장 같은 델 혼자 가게되면, 반드시 전화를 해서 필요한 것이 없는가 확인을 하고 갔던 김에 내 것까지 심부름을 해주는 일을 무심히 넘긴 적이 없었다.
먼데 손님이 자주 오는 나를 위해 같이 분주하고, 사교적이 못되는 나를 위해 이웃을 향한 귀를 열어주고, 필요할 때는 대변인이 되어주어, 손아래 나이임에도 존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침착하면서도 반짝이는 재치와, 하나를 보면 둘을 배우는 지혜와, 인간사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부작용이나 껄끄러움 같은 것도 윤활유를 뿌린 듯 매끄럽게 넘길 줄 아는 아량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뛰어난 유머감각과 넘치는 활력으로 모든 주위사람을 품는 여자였다. 이웃에게 그러할진대, 남편과 아이들에게 바치는 헌신과 사랑은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경지였다.

단풍의 향연이 어우러진 어느 가을아침에 전화가 와서, 함께 세일 품목만 골라서 알뜰 쇼핑을 하고, Thanksgiving Day에 쓸 가을무늬의 식탁보도 하나씩 새로 사고 흐뭇한 마음으로 헤어진 후, 이틀 후에 아프다고 하더니, 다시 삼일 후에 그녀 특유의 정열로 사랑하고 사랑해서 온몸으로 껴안았던 모든 것을 맥없이 놓아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 피안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쉽고 어이없는 것이었던가. 웃음과 눈물과 사랑과 갈등의 길고 길었던 오십 년의 여정을 이렇게 우습게 포기해도 되는 것인가. 곁에서 대비도 없이 부대끼던 사람들의 배신감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사람은 대책 없이 가버리고, 변함 없는 가을이 벌써 세 번 째 그녀의 추억을 안고 찾아와서 함께 머무르다 겨울비에 등을 밀려 사라지곤 한다. 처음엔 이사를 생각해 보기도하고 그 집 앞을 못 지나가 돌아서 다니기도 하면서 무던히도 원망을 하다가, 시간이라는 약으로 아픔이 낳아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그녀와 같이 갔던 곳엘 가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다가 깜짝 놀라곤 한다.
Freeway 를 빠져서 집까지 들어가는 오마일 정도의 좁은 길은 바쁠 때는 짜증나게 멀고, 한가할 때는 oak tree 가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 저녁 이곳을 지나면 이 길이 너무 좋아 이사를 못 가겠어요. 하던 목소리가 나무사이에서 들려온다. 벌써 또 가을이야, oak tree 사이사이에 빨강노랑 단풍이 환상이예요 환상. 정말 질기게도 내 곁을 안 떠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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