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추석에 얽힌 추억

2004-09-27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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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정(어린이 사역자)

이 지구 상에는 좋다고 하는 많은 나라와 도시가 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나라와 고향만큼 정겹고 좋은 곳은 없다. 그 정겹고 좋은 찾아 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고향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추억은 특별한 것이며 세월이 갈 수록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추석이 돌아오니 고향생각이 간절해 진다. 고향에 얽힌 많은 추억이 있지만, 가을에 알밤을 줍던 일은 나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추억이다. 우리 마을에서 좀 떨어진 들 한가운데 큰 고목 밤나무가 있었다. 대낮에는 밭에서 김을 매던 농부들이 그 그늘에서 땀을 식혔고 새참을 먹었다.

오후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밤나무에 올라가 건초로 집을 짓고 소꿉놀이를 했다. 밤나무 허리에는 큰 구멍이 파여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이 부엉이 집이라고 믿었다. 밤에 가끔 ‘부엉 부엉’ 하고 부엉이가 울고 가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밤을 주으러 각자 호롱불을 들고 새벽 4시에 밤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매끈 매끈한 알밤을 줍는 일은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 날은 새벽 3시에 간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굵직하고 좋은 알밤들이 밤나무밑에 수도 없이 떨어져 있었다. 어떤 때는 호롱불이 필요 없는 밝은 달빛아래서 알밤을 주워 모은 적도 있었다.

추석이 오기까지 언니와 나, 동생이 모은 알밤은 한 자루도 넘었다.
어머니는 밤을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해 장독대 옆에 흙을 파고 묻어주시면서,“이건 추석에 밤 떡 만들고 너희들 운동회 때 삶아 갈꺼야” 라고 말씀하셨다. 건드리지 말라는 당부이셨다. 추석 전날, 어머니는 하얀 떡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하고 고소한 팥과 콩, 달콤한 설탕과 깨, 그리고 밤으로 속을 만들고 우리들을 둘러앉히신 후, 송편을 빚으셨다. 우리는 밤 송편을 만들었는데, 떡반죽을 떼어 알밤을 넣어 두어번 만지작거리면 밤송편이 쉽게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밤송편에는 빨간 맨드라미 꽃잎을 붙여 표시를 해 놓았다.

솔잎을 깔고 송편을 쪄서 물에 담갔다가 참기름을 살짝 바른 후 한입에 쏙 넣는 밤 송편의 그 향기로운 맛이란 얼마나 기가막힌지! 그러나, 추석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 맨드라미 꽃물 들여진 밤 송편을 찾으면 없었다. 벌써 형제들이 다 골라 먹은 것이다! 알밤은 운동회날 하루 종일, 그리고 겨울 내내 우리에게 좋은 간식이 되어 주었다. 이제 아버지도, 그리고 매년 추석 때 송편을 빚어주시고 밤을 삶아주시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되었다. 오빠도 육십이 넘고 언니도 오십 중반이 되고 동생도 벌써 사십대 후반이 되었다. 사촌들과 친척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자주 찾아볼 수 없는 고향이요, 가족과 친척이니 추석 명절에는 안부전화를 드려보는 게 좋겠다. 수화기를 들고 “송편 드셨어요?”하면 얼마나 반가워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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