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편지

2004-09-07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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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아침마다 화초에 물을 흠뻑 주거나 분무질을 한 뒤에 창가에 놓아두면, 물과 햇살의 조화로 건조했던 잎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그들이 시원해 하는 모습을 볼 때, 내 안에도 미진수의 활력이 솟아 오른다. 꽃을 보기 위해 난을 기르고 또는 다른 화초를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꽃이 피어 오르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마치 그리던 이로 부터 받은 편지와 같다고나 할까. 편지를 그렇게 자주 주고 받는 것도 아니고, 흔한 전화 한 통도 걸지 않는 편이지만 육순이 넘은 그 분의 손수 쓴 편지를 받을 때 마다 ‘편지’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침이면 난초와 눈을 뜨고 저녁이면 난초와 함께 잠을 드는 분이 있다. 그래서 인지 난초를 가까이 하는 그 분에게는 진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은은한 난꽃 향내가 난다. 생선을 싸두었던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싸두었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이 비유의 의미는 우리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거지로 부터 발현되는 향기라는 뜻이리라.

지난 해 난초 네 분을 주시며 이 난은 샌프란시스코 처럼 안개끼는 지역에서도 잘 자라며, 내년 사오월이면 하얗고 오렌지 빛을 가진 꽃을 피운다.며 내 난 키우는 솜씨를 두고 보겠다고 하셨다. 정말이지 올 사월에 황금색 봉우리를 터뜨리며 고고하게 난 꽃들이 다투어 피어 올랐다.
얼마전 받은 편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분의 손끝에서 나온 정성으로 키운 하얀 꽃들이 소박하고 눈부시게 피어있는 난꽃 사진과, 지난 달 이태리를 여행하고 왔다는 소식과 더불어,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지 못하는 것도 팔고의 하나라고 하니 시간 내어 난꽃 향내 맡으러 오라는 내용의 글을 빼곡히 쓴 편지였다. 편지를 읽은 후 전화를 당장 걸어 보내 준 편지 잘 받았다고 하면 왠지 그 감회가 쉽게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뜸을 들였다가 편지로 답장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잉크를 묻혀가며 날카로운 펜으로 쓴 글이나 편지라야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햐면 편지를 쓸 때 펜으로 쓴 글은 지우기가 곤란하므로 편지를 쓰기 전,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또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 한 번쯤 더 생각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고 부터는 쉽고 간편한 워드 다큐먼트에 타입한 글이나 편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게 된다. 컴퓨터에 타입한 글이 정서가 없고 메말랐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글쓴이의 필체를 통해 그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또한 그 사람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언제인가 천왕봉이 훤히 보이는 지리산 자락에서 잠시 머물 때에 어느 스님에게 보냈던 편지가 주소 불명으로 반송된 적이 있었다. 화선지에 붓펜으로 쓰여진 그 묵혀 두었던 편지를 찾아 벽에다 붙여 놓고 보니, 산사람의 기상이 담긴 필체가 새삼 시원하다. 손과 마음의 기운이 들어간 편지를 보며 앞으로는 짧은 몇 줄의 글이라도 종이에 힘을 불어 넣은 그런 글을 띄워야 겠다.

지리산 깊은 골에
여름은 깊었어라.
밭메고 나무하며
청매가풍* 이어가네.

다향산방 홀로 앉아 선록 한 모금
찻잔에 남은 향기는
잊었던 조주일언*
선심을 피워내고

문 밖 앞산엔
자욱한 안개 걷히어
천왕봉이 청쾌하다.

주해석:
*청매: 청매 선사는 지리산 자락에서 청렴하게 살다간 조선시대의 눈 밝은 선승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 되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고, 고난에 처한 민중과 함께 하는 동사섭의 실천적 모습을 보여 준 선구자임.
*조주 :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으로서 끽다거 - 자네도 한 잔 하게라는 화두로 제자들의 분별심을 타파하도록 일깨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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