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필산책/서울의 빗속을 가다

2004-08-23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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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극작가 주 평

나는 지금 서울에 머물고 있다. 7월의 내 칼럼에서 적었듯이 동량 유치진 선생의 연극축제의 연출을 맡아 내 고향 통영의 바닷가에 머물고 있어야 할 내가 어찌 서울 하늘 아래 있을까? 현정권의 과거사 청산 방침의 여파 때문에 동량 선생의 친일문제가 선생의 고향인 통영에서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통영시가 많은 예산을 들여 기획했던 이 연극제가 끝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들이닥쳤다는 찜통더위! 그러나 그 더위도 이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물러가고 아침 저녁의 날씨가 캘리포니아의 날씨를 연상케 한다. 내가 사는 실리콘 밸리에서는 흔히 받쳐 들지 않는 우산을 받쳐 들고 마치 빙크로스비가 ‘Sing in the Rain’을 부르며 거리를 달려가듯 나도 서울거리를 달려간다. 그리고 요즘 따라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밟고 오르내린다. 오늘도 처음으로 만날 그 미지의 여학생 얼굴을 상상하며 약속된 장소로 가고 있다. 그 미지의 사람이란 주평 연구로 석사논문을 준비중인 동국대학 대학원 여학생이다. 어제 역시 나의 연구로 석사논문을 준비 중인 인하대학의 대학원 학생에 이은 두 번째의 만남이다. 이미 내 연구로 3명의 석사와 나의 한국에서의 아동극 활동을 중심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두 사람의 논문집이 내 손에 전달되었을 때, 그래도 내가 과거 이 땅에 뿌린 아동극의 열매가 내 기대 이상으로 결실했구나 하는 생각에 나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뿐만 아니라 출판계의 혹심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1권도 아닌 10권의 내 전집 발간의 마지막 교정을 보면서 활자 하나 하나 그리고 대사 하나 하나의 검은 자국 속에 내 과거의 피맺힌 사연들과 내가 아동극 운동을 중도에 팽개치고 미국으로 떠나간 그 사연의 아픔이 새삼 가슴을 짓누른다. 그러나 마음껏 자랑하고 싶은, 마치 어린애 같은 심성으로 들떠있는 서울에서의 머무름! 그것도 전에 없이 두 달 동안이란 장기 체류기간 동안, 나는 50명에 가까운 그리운 얼굴들과 마주하며 아름다웠던 사연들과 쓰라렸던 과거를 반추하고 있다. 한국의 현 시국이야 어쨌든 간에 우리의 만남 속에는 오로지 오가는 정의 훈기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전에 없이 대학로의 극장거리를 기웃거리며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여러 소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어린이 연극을, 어떤 때는 아동극 연구 교수들의 인도를 받으며 어떤 때는 나 혼자 객석에 앉아 좁다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아동극을 구경한다. 그리고 내가 과거 이 땅에서 펼쳤던 아동극 공연과 비교해 본다. 그런데 그 공연 모습이 전혀 다르다. 공연 기획자들인 그들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하고 있는 공연타입이 새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내 보기에는 그게 아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공연 양상이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고 무대를 통하여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상상케 하는 그런 촉매제가 되는 공연이 아니고 이는 TV에서 흔히 하는 저질 코미디에 가까운 모습을 볼 때, 그들의 공연을 통해서는 어린이의 정서심이 결코 길러질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한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이 서울 하늘에 머무는 동안 틈을 내어 어린이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아동극다운 아동극 한편이나마 보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우리 민들레와 극단 ‘금문교’ 그리고 노인극장 차기 공연 준비를 위해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욕심을 부려볼 것이다. 이러한 나의 과욕에 가까운 기획이 이번 한국 나들이에서 느끼고 또 보람으로 돌려 받았듯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결과로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말이다. 나는 내일도 빗속을 누비며 정다운 사람들을 만나러, 그리고 아동극을 위한 만남 때문에 서울의 어느 거리로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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