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죽는 김선일씨
2004-06-29 (화) 12:00:00
이동원/락빌,MD
이라크 강경파에 납치됐던 김선일 씨의 살아야겠다는 울부짖음이 귓전에서 사라지기 전에 살해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같은 핏줄로서 분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여 잠 못 이룬 여러분이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더욱이 선교사가 꿈이었다는 젊음이 애매하게 왜 죽어야만 됐는가를 생각하면 여러 면에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과연 파병을 해야만 되는가. 미국의 전쟁을 돕기 위해 젊은이들의 죽음이 준비된 파병을 해야만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되지 않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돈을 벌게되는 것일까.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직접적인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강대국에 일방적으로 침략을 받고 있는 나라에 완전무장을 한 정예부대를 파병하는 자체는 5,000여 명의 전사자와 함께 중상을 비롯한 고엽제에 의해 4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신음소리를 내며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 월남 파병의 아픔을 보아서도 다시는 우리와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에 또다시 파병을 해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투병을 파병하면서 건설과 봉사를 위해 파병을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파병의 대가로 얻어지는 소위 국익이라는 논리로 달러를 챙기겠다는 생각은 남가일몽일 것이며 미국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우리의 속담대로 떡을 줄 사람을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꼴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미국이 파병의 대가로 이라크를 재건하도록 한 상을 차려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의 어리석음 같은 착각일 것이다. 순전하게 남의 나라 이해관계로 싸우는 전쟁에 용병 비슷하게 끌려가서 피를 한 번 흘렸으면 됐지 또다시 남의 나라 명분 없는 전쟁터로 젊은이들을 내보내 국제신의를 얻고 국익을 챙긴다는 그 자체는 젊은이들의 피를 돈과 바꾸는 매매행위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미국의 크고 작은 업체에서 하청의 재하청, 또 하청에서 얻어지는 노동의 대가를 위해 국익 운운하면서 우리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사막의 모래 위에 피를 흘려야만 되는가.
또한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국제신의를 어느 나라에서 얼마만큼을 얻겠다는 말인가. 월남파병의 대가로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국제신의란 것을 챙겼는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여러 나라에서 비웃음을 샀듯이 이번에도 여러 나라에서 비웃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살펴볼 일이다.
그리고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일부 신문들이 사용한 처형이라는 말이다. 처형이라니. 처형이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극악한 흉악범을 사형집행 했을 때 쓰는 말이다. 선교사, 아니면 목사가 꿈이었다는 김선일 씨를 다시 한번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우울한 나날들이다. 애매한 죽음에 넋을 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