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작은 것들의 커다란 축복

2004-04-12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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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상/수필가>

작년, 서울의 지하철 층계를 오르며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만 보였다. 변하지 않은 것은 하늘뿐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거의 바깥에 이르는 층계 왼쪽 구석에 남루한 장님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모두들 무심히 그 앞을 스치는데 5,6세 되어 보이는 남매인 듯한 아이들이 할아버지 손을 다소곳이 잡더니 움켜쥐었던 돈을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출구 쪽으로 내달음질 쳤다. 입구에는 젊은 여인이 아이들이 달려오자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혼자 보기 아까운 대목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K형이 띄운 서울 구로 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 글을 요약한다.
<55가구가 함께 사는 벌집 중 방 한 칸. 외할머니 표현대로 라면 박스 만한 방에 할머니랑 여동생 용숙이랑 자고 엄마는 구로2동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신다. 아빠는 청송교도소에 계신데 엄마는 죽었다고 말한다. 엄마는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에 취해 울면서 “애물단지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 버리자”하실 때가 많다. 친구들이 엄마가 술집작부라고 놀리는 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지난 부활절 날 “엄마 미워했던 것 용서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 날 교회에서 준 찐 계란 두 개를 할머니 어머니에게 드리며 생전처음 전도를 했다. 몸이 아파 누워 계신 엄마는 “흥 구원만 받아 사냐.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3만원 더 올려 달라는데 예수님이 50만원만 주시면 예수를 믿지 말라도 믿겠다.” 엄마가 믿는다는 말에 열심히 기도했다.
어린이 날 글짓기대회가 덕수궁에서 있었는데 서초동에서 아버지와 꽃가게 하던 시절과 지금 상황과 엄마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써서 1등을 했다.
그 날 저녁에 글짓기 심사원 원장이며 동화작가인 노 할아버지께서 물어 물어 찾아오셨다. 할머니는 급히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시고,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내라는 말씀에 엄마는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엄마가 일하시는 술집에 가서 약주라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자신이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이나 놓고 가셨다. 밤늦도록 동화책을 읽는데 책갈피에서 흰 봉투가 하나 떨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수표였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예수님이 구원 만 주신 게 아니라 50만 원도 주셨구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다.
엄마는 주일날 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솔방울 만해 지셨다. 또 같이 죽자면 어쩌나 하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 꼭 갚아 드린다고 말이야.” 엄마의 변화를 예수님께 감사하고 커서 수표를 꼭 갚겠으니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 건강하게 사시도록 돌봐주시라고 기도 했다.>
이번 부활절에 우리교회에서는 3일간 피정을 했다.
성당에서 궂은 일은 도맡아하는 조금은 대접을 못 받는 중년 남자가 우리 그룹이었다. 그와 마주 대화하긴 처음이다.
그는 발표할 차례가 되자 나의 영어처럼 우리말의 주어 동사 목적어가 뒤죽박죽이었다. 귀 기울여 보니 주님을 만난 체험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에 눈은 빛나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쁜 표정이었다. 순간 내 가슴에도 무언가 떨림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그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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