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 100주년
2004-04-01 (목) 12:00:00
<권정희 미주본사 논설위원>
미국의 소도시에 살면 대개 가장 힘든 게 음식 향수이다. 그래서 한국 식품을 사려고 2-3시간씩 운전을 하는 일은 보통이다.
80년대 초 우리 가족은 작은 대학도시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한국 식당은 고사하고 한국 식품점도 없었다. 대부분 유학생이던 그곳 한인들은 주말이면 인근 큰 도시로 나가서 한국 시장보고 외식하고 돌아오는 게 큰 호사에 속했다.
‘외식’메뉴는 물론 주로 한식이지만 그 못지 않게 인기 있던 것이 한국식 중국 음식이었다. 자장면, 짬뽕, 탕수육… 2시간씩 운전하고 가서 자장면 한그릇 먹고 흐뭇해서 그 먼길을 돌아오곤 했다.
한국인들에게 한국음식을 제외하면 자장면만큼 친근한 음식도 없다. 40대 전후 중년층에게는 ‘졸업식’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자장면이고, 군인들이 외출 나와서 제일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자장면과 통닭이라고 한다.
그 자장면이 한국인들의 입맛에 끼여든 지 100년이 되었다. 인천시가 내년 ‘자장면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 축제를 준비 중이라고 발표했다. ‘자장면 축제’를 벌이는 것은 말하자면 자장면은 중국 음식이 아니라 한국 음식이라는 해석. 실제로 1998년 인천시는 자장면을 향토 음식으로 지정했다.
자장면의 탄생은 구한말 조선의 역사와 상관이 있다. 1884년 청나라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압력을 가해 5,000여평에 달하는 인천 땅에 대한 조차권을 손에 넣는다. 그곳에 화교 소학교와 영사관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화교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중국 촌이 형성되었다. ‘청나라의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거리 이름이 ‘청관’거리가 되었다.
193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청관은 대단히 번창했다. 산동성과 인천간의 활발한 교역으로 한때 화교 인구는 30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청관이 번창하면서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 ‘청요리’. 청요리가 조선인들에게서도 인기를 끌자 서민 대상 값싼 요리로 만들어 낸 것이 자장면이었다.
그 자장면을 처음 누가 만들었는 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자장면 100살’이라는 계산은 자장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음식을 판 공화춘이라는 식당이 1905년 개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산동, 북경, 대련 등 중국 북부지역에서 먹던 음식을 조선사람들 입맛에 맞게 전분과 국물을 넣어 묽게 만들고, 카라멜을 섞어 단맛과 검정색을 더한 것이 100년의 수명을 만들어 냈다. 음식의 토착화에 성공한 대표적 케이스이다.
한국음식은 미국땅에서 어떻게 토착화 할수 있을까 - 한인 사회의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