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문> 날개 없는 새의 짝이 되어

2004-03-08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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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상<수필가>

언제부터인가, 내게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주변머리 없이 22년 하던 가게에, 경찰의 끈질긴 함정수사에 일하던 세 청년이 정신을 바짝 차렸는데도 내리 걸려, 2년 동안 재판하다가 가게를 파는 조건으로 물러났다. 이제 먹고 논다는 핀잔을 들어도 딱히 할말이 없다.
주위에서 그렇게 말렸는데도 이민 백년사를 맡아 일년동안 묵은 신문 끌어안고 지냈다. 지난달에는 백년사업회에서 비행기표 한 장 달랑 얻어들고 서울에 나가 전철과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고 출판사로 교정을 보러 다녔다.
답답해서 주일날은 명동성당엘 갔다가 인사동으로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순옥여사의 귀천(歸天) 찻집을 찾아갔다. 다섯 평이 될까 작은 공간에 빈틈없이 손님이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목여사 조카가 운영하고 있어, 두 골목 지나 목여사가 새로 오픈한 곳으로 내킨 김에 찾아갔다.

천상병은 서울 상대를 나온 시인이었지만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다하여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나온 뒤, 좀 이상한 행동을 하는가 싶더니 그 후 행방불명되었다. 시인들과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1971년 12월 <새>라는 유고시집을 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새>중에서
그런데 시립 정신병원에서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연락이 왔다. 목여사는 고등학생 때부터 오빠친구인 천상병시인을 만나 오랜 동안 알고 지낸 터였다. 병원을 찾아간 그녀의 극진한 치료로 72년 4월 퇴원하고 그 해 5월 김동리선생의 주례로 혼례를 올린다. 기댈 데 없는 아이 같은 순수함과 손을 놓아 버리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걱정과 애잔함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돌보는 심정이었다. 버스 종점 셋집은 12가구가 사는 벌통집, 언제나 와글와글 북새통 아이들도 어른들도 떠들었다. 아이가 없는 그녀 집은 남편이 아이 이상으로 떠들었다. 쇳소리로 쩌렁쩌렁 목소리 하나는 알아주는 남편이 잠잠하면 셋집에 사는 모두들 궁금해했다. 하드웨어는 그렇게 생겼어도 소프트웨어는 깨끗한 눈과 같은 사람, 순수함과 천진스러움의 대명사, 드라마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흑흑흑 울고, 조금 우스워도 깔깔깔 배꼽을 잡았다. 브람스 교향곡4번만 틀면 금방 눈물을 흘렸다. 편안한 구상화만 보면 갖고 싶어했고 쉬운 시를 좋아하는 대신 어렵게 쓴 시를 보면 서슴없이 욕을 해댔다. 예쁜 여자 손님이 歸天에 오면 예쁘네요 예쁘네요 손을 잡고 놀러도 다녔다.


남편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몹쓸 전기고문을 세 번이나 당 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그들은 성이 없는 부부였다. 그런 천시인은 1993년 4월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돌아갔다.
인사동 찻집 입구 돌 의자에는 그 의 시 歸天이 새겨 있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 나라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정말 천시인은 목여사를 만나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다 갔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행복>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 매만져 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대상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생각 이상으로 컸단다. 살을 부딪쳐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그토록 안타가운 것임을 이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목여사의 <날개 없는 새의 짝이 되어>라는 글 모음집의 이야기들이다.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남편은 그녀 손을 느닷없이 무척 아프도록 꽈악 쥐어 주었다. 천상병식 애정표현이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둘이 하나되어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았다.
남들은 삶의 흔적을 남기는데 급급한 세상에서, 가난처럼 보여지는 장해물을 탓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선함에서 세상은 행복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배려가 사랑이다. 지금까지 내 안에 고여있는 불만들은 과욕이다. 조금 남은 나의 시간도 체면과 허세를 털고 소중한 선택의 길로 가보자, 그런 생각도 든다.
웅크리고 귀천에 들어 올 때와는 달리 밖은 겨울답지 않게 화창했으며, 이 세상으로 소풍 나온 이들로 인사동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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