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극작가 주 평
노산 이은상 선생이 읊든 내 고향 남쪽 바다의 마산(馬山)이 아닌, 내 고향 통영을 다녀온 지 벌써 석 달이 가까워왔건만, 나는 그 바닷가 외진 곳에 자리 잡은 그 찻집과 그 찻집의 ‘모나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찻집의 모나리자! 이는 어느 시골 다방 벽에 걸려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모나리자의 사진판 그림이 아니다. 그 찻집의 여자 주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라래 찻집! 마치 옛 향가(鄕歌)에서나 나올 법한 좀 고풍스러운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을 그 찻집을 찾아 가게 된 것은 통영에 있는 여류수필가 양 여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곳으로 안내되어 가면서 통영 시내의 번화가가 아닌 이런 외진 포구(浦口)의 갈대밭 언저리에 왜 찻집을 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내 머리 속에 떠 올랐다.
저 멀리 한려수도의 석양에 물든 바다 한 자락이 내려다 보이는 그 바라래의 좀 불편스러운 나무의자에 앉았을 때, 40대 안짝으로 보이는 여인이 대추차 두 잔을 우리 탁자 위에 놓고는 처음 보는 방문객인 나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여인의 차가우리 만큼 쓸쓸하게 느껴지는 입가의 미소와 그녀의 모습에서 모나리자를 실제로 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나와 양 작가와의 대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차 쟁반을 들고 선 채 하염없이 먼 바다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뜬 그녀의 눈매는 흐려있었고, 바다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서 깊은 한숨소리 마저 감지(感知)되는 듯 했다.
왜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바다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을까? 양 여사가 들려준 그 여인에 대한 기구한 사연은 마치 비극적인 연극의 한 토막 같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그녀가 꿈 많던 소녀기를 갓 넘긴 20살에 결혼을 하여, 젊은 사업가인 남편과 외진 이곳에 빨간 벽돌집을 지었다. 마치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들이 흔히 꿈꾸는 비둘기 집 같은 집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집 앞 갯벌의 갈대밭에서 노는 한 쌍의 백로처럼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편의 암 선고는 그들의 행복을 10년 세월만큼에서 멎게 하고 말았다.
남편은 시한부 삶을 살면서 집 발코니에 앉아 저 멀리 바다에 떠 있는 개구리 섬이란 이름의 섬과 그 섬을 맴돌며 부서지는 파도를 화폭(畵幅)에 담았다. 그리고 그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결어(結語)는 자기가 죽으면 화장하여 그 뼛가루를 개구리 섬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는 그 개구리 섬에서 언제까지나 그가 죽도록 사랑한 아내가 사는 그들의 집쪽을 바라보며 그녀를 지켜줄 것이라고.
그런 사연 때문에 그녀는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남편이 그림을 그리던 그 발코니를 개조하여 그렇게 찻집을 내었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허구헌날 저 멀리 개구리 섬 쪽을 쳐다보며 가슴에 멍든 그녀의 세월을 견디어 내면서 청상(靑孀)의 나날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나를 자기 집 토방(土房)으로 양 작가와 함께 초대하여 생굴과 손수 삶은 굴을 맛있는 초장으로 대접했던 문학애호가로 알려진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는 게 견디기 힘들어 제발 다른 짝을 찾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타이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만났다 쉽게 헤어지는 한국적인 현실에서 좀 고리타분한 스토리일는지 몰라도 그날 저녁 노을이 머물다 가는 그 찻집에서 망부석(望父石)같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 슬픈 모나리자를 떠올리면서 나는 ‘그 찻집의 모나리자’라는 희곡(戱曲)을 쓰기 위해 내 메모(Memo)의 노트에다 플롯(Plot)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