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김치 쇼
2004-02-12 (목) 12:00:00
김현희<주부>
내게는 아직 두 살이 안된 딸이 있다. 비슷한 또래를 둔 엄마들이 다 들 그렇듯이 나의 하루는 딸로 시작돼서 딸로 끝난다. 하루종일 이 녀석을 쫓아다니느라 ‘칼 루이스’ 못지 않은 순발력과 ‘황영조’같은 지구력에 ‘이만기’에 버금가는 근력을 가지게 되었다. 어찌나 재빠른지 부지불식간에 휙 사라지기 일쑤고, 왠지 조용하다 싶으면 어느 구석에선가 사고를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를 데리고 겁도 없이 박스 채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보겠다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꼭 내 딸만한 딸을 둔 이웃하고 둘이서 아침에 모여 배추를 자르는데 요 녀석들이 엄마들을 가만 둘 리가 없다. 커다란 부엌칼이 쓱싹쓱싹하는데 겁도 없이 손을 갖다 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은 바나나 킥 과자로 녀석들을 유인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평소에 그렇게 매력적이던 과자도 휙휙 던져버리고, 엄마들의 일터로 다시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들은 엉덩이로 배수진을 치고, 팔꿈치로 바리게이트 삼아 물밀 듯이 다가서는 두 딸들을 막아내며 배추 절이기는 일단락을 지었다. 김치가 절여지기를 기다리며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까지 나섰던 1부에 비해 2부 순서는 광란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우리 딸이 절여진 김치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대서 쫓아내자, 아이들 둘이 번갈아 가며 똥을 싸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참 양념을 배합해야 할 손으로 엄마들은 차례로 화장실로 가서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만 했다. 다시 일터로 돌아왔나 싶더니 우리 딸이 기저귀를 벗어 던지고 남의 집 이불에 가서 얌전하게 실례를 했다. 다른 집 아이는 빨갛게 버무려진 김치 속이 몸에 닿았는지 아프다고 울기 시작하고, 우리 딸은 조용하다 싶어서 혹시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샴푸를 로션으로 알고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두 엄마가 망연자실해서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아이들을 재워놓고 다시 하기로 했다. 나는 딸을 집으로 올려보내고, 울던 다른 집 아이도 잠이 들어 겨우겨우 김치 담그기를 마치려는 때에 집에서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아이가 우느라고 잠도 안 잔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끝내고 집에 와보니 엄마가 자기를 혼자 놔두고 가버렸다고 생각했는지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더욱 더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아이를 가만가만 진정시켜놓고 생각해보니 내가 김치를 담근 건지 김치가 나를 담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을 방해한다고 아이한테 소리 지른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한 바탕의 김치 쇼가 끝나고 김치가 익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요즘, 또 다시 야심만만한 계획이 전율처럼 지나간다. 동치미가 맛있던데...박스로 사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