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동백꽃

2004-02-10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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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덕<주부>

헤 일 수 없이 수 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 내는 아픔에 겨워~ 애절함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는 이 미자의 동백 아가씨 노래에 익숙해 있는 내게 동백꽃은 빨갛게 뭉친 슬픔이 손만 대면 눈물처럼 떨어질 것 같은 꽃 이였다. 폐병으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는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어울리는 꽃, 죽도록 사랑했노라 란 꽃말처럼 처절한 한이 서린 꽃, 이런 나의 동백 찬가는 미국에 와서 끝나 버렸다. 몇 해전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입구에서 나를 맞은, 아기 얼굴처럼 환하고 복스러운, 탐스럽게 핀 꽃이 동백임을 알았을 때 마치 배신 당한 느낌 이였다.

손바닥에 쏙 들어와 부스러질 것 같은 꽃. 피보다 더 진한 붉음으로 울음을 삭이는 꽃. 이런 나의 환상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순진 무구하게 덩그렇게 피어있는 이땅의 매력 없는 동백이 차라리 박꽃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생각 없이 커다랗게 피어있는 그 꽃 앞을 지나 다니며 언젠 가부터 마음에 위안을 받기 시작했다. 옆집으로 이사 가듯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미국으로 날라와 시작한 이곳 생활이 우리에게 만만치 만은 않았다. 오이는 호박만하고 호박은 오이 같고, 남들은 잘하는 영어가 내 귀와 입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으며 무엇하나 편히 즐길 수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도 학교 생활에 잘 적응 해준다면 무엇인들 못 견디었겠느냐 마는 학교 간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일까지 터졌다. 한국 친구를 만나 신이 나서 꼬부라진 V자 손 모양을 하고 사진 찍은 것이 아시안 깽 의 싸인 이라나.

우리 아이가 갱에 연루 되어있다 는 학교 통보에 영어라서 잘못 들었을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달랬지만 경찰의 심문까지 받은 아이가 파랗게 질려 들어 왔을 때는 교육을 위해 이곳에 아들을 데리고 온 내 자신이 너무 밉고 한심했다. 겨우 13살, 무엇이던 잘 해 보려고 신이 난 아이의 싹을 무참히 잘라 버린 것 같아 마음도 아팠지만 다시 한국 가자고 조를 때마다 가슴에 멍이 드는 것 같았다. 결국 학교의 사과를 받아 냈지만 이렇듯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속수 무책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렇게 시작된 미국 학교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내느라 저 또한 얼마나 힘들었으며 도움이 못 되어 주는 부모는 어떻겠는가. 늦은 나이에 이민 와서 뿌리 내리는데 속상한 일이 어찌 아이 일 뿐이겠는가.

수도 없이 마음의 보따리를 쌓다 풀었다 하며, 그렇게 해가 바뀌다 보니 이제야 이땅의 동백도 동백으로 보인다. 이민의 선배들이 말한 그렇고 그런 세월들이 어김없이 나에게도 거쳐가고 나니까 이제야 이곳이 좋아진다. 따지고 보면 좋아진 것 별반 없는데, 고마운 세월은 아이를 비 바람 속에서도 견딜 수 있게 든든한 뿌리를 내려 주었다. 웃는 모습이 많아진 아이가 지금은 곁에만 있어도 행복한데 머잖아 대학으로 떠나게 되고 나의 동백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드나 드는 나를 편안하게 맞으며 또 다른 위로를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날 새빨갛게 피어있는 한국의 동백이 그리운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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