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망신당한 사람들

2004-01-23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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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중서부 한복판에 놓여 있는 아이오와는 옥수수 밭으로 유명하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꿈의 들판’(Field of Dreams)을 보면 새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여름 내내 낮에는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고 밤에는 반딧불이 보석처럼 들판을 수놓는 곳이 아이오와다.
이런 목가적인 고장이 전국에서 몰려든 정치인과 미디어 인파로 북적대는 시기가 있다. 4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대통령 선거 때다. 1972년이래 미국에서 제일 먼저 북풍 한설이 몰아치는 1월에 대의원을 뽑는 아이오와는 무명인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들판’이다. 76년 1월 당시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카터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승리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겼다고 당장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80년 아버지 부시나 88년 도울은 이곳에서 승리하고도 당내 지명조차 따내지 못했다.
다른 49개 주와는 달리 아이오와에서는 예선(primary)이 아니라 지구당 대회(caucus)를 치르는 것도 특이하다.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가 한 표를 찍기만 하는 예선과는 달리 지구당 대회는 유권자들이 강당에 모여 토론도 하고 회의를 거쳐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를 밝히게 돼 있다. 시작부터 끝나는데 4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바쁜 사람이나 정치에 상당한 열정이 있는 없는 사람은 참여하기 힘들다. 아이오와 코커스 결과가 종종 여론 조사와 다르게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올해 선거에서도 아이오와는 ‘점치기 힘든 주’의 전통을 유감 없이 발휘, 1, 2위를 다툴 것으로 예상되던 딘과 게파트를 선두와는 먼 3, 4위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 결과 고어와 카터, 브래들리와 하킨 등 당내 중진들의 지지 성명을 받아 놓고 느긋하게 지명자가 될 날만 기다리던 딘은
뉴햄프셔에서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됐고 게파트는 울며 33년의 정치 역정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이미 88년 대선 당시 아이오와에서 승리한 적이 있는 게파트나 명실상부한 선두주자로 여겨졌던 딘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금과 당 지도부의 인준, 지지자들의 열성 등을 들며 딘의 승리를 장담했던 정치 평론가들도 이번에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이들은 뒤늦게 머리를 긁으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설명하기에 바쁘다.
아이오와에서의 이변으로 딘의 등극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던 민주당 후보 지명전이 갑자기 재미있게 됐다. 역시 ‘선거는 뚜껑을 열어 봐야 안다’는 옛 속담이 그르지 않은 모양이다. 뉴햄프셔에서는 또 어떤 깜짝 쇼가 벌어질지 궁금하다. <민경훈 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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