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반미 감정 촉진제

2004-01-16 (금) 12:00:00
크게 작게
새해부터 미국에 들어오는 외국인은 초장부터 불쾌한 경험을 해야 한다. 지문날인과 사진 찍기가 그것이다. 그 자체가 힘든 작업은 아니지만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일단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본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서방 각 국민은 면제되고 한국 등 아시아나 남미, 중동,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런 수모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뜩이나 ‘전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라고 으스대는 미국에 대해 가졌던 외국인들의 반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반미 감정을 유발하더라도 이를 통해 테러리스트를 적발해 낼 수만 있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테러 예방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대다수 테러리스트의 지문을 갖고 있지 않다. 현 상태에서는 빈 라덴이 성형 수술을 하고 들어와도 잡기 힘들게 돼 있다.
지문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어 장차에 대비하겠다는 것인데 당국에 의해 지문이 채취된 테러리스트가 “나를 잡아 잡수쇼” 하고 버젓이 미국 공항에 들어올지는 의문이다. 이런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 200억달러를 들여 연 2,400만에 달하는 외국 방문자의 지문을 찍겠다는 것은 돈과 정력의 낭비다. 꼭 테러를 저지를 의향이 있는 단체면 신원이 밝혀진 경력 단원보다 한번도 미국 근처에 가보지 않은 신참 테러리스트를 보낼 것이다.
미 입국자의 신원을 조사하기 위해 회교권 각국 미 대사관에 비자 발급 전 인터뷰를 의무화 한 법규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담당영사 수는 거의 늘지 않아 비자처리 업무는 마냥 지연되고 있다. 수십 개 회교권 국가 가운데 테러리스트를 배출한 나라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등 수 개에 불과하다. 파키스탄과 이집트, 중동 출신이 많은 영국, 모로코에서 레바논에 이르기까지 아랍계 이주자가 급증하고 있는 프랑스, 9·11 테러리스트의 유럽 거점이었던 독일을 지문 날인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모든 회교권 방문객을 범죄자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말 테러리스트를 색출할 생각이면 주재 영사 수를 대폭 늘려 입국수속 지연 문제부터 해결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을 집중 조사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또 현행 제도는 입국만 문제삼았지 입국 후 비자가 만료됐는데도 떠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포기하고 있다. 9·11 테러리스트의 대다수는 합법적으로 입국한 후 비자가 만료됐는데도 남아 있던 자들이다.
빈민 노동자 출신으로 브라질 대통령이 된 룰라는 미국이 이 조치를 취하자 브라질 방문 미국인에게 지문날인 찍는 것을 의무화했다. 룰라와 출신이 비슷한 노무현 대통령도 총선을 의식, 브라질 흉내를 낼까 걱정된다. 미국은 별 실효 없이 자원만 낭비하고 반미 감정을 촉진하는 지문 날인제를 하루 속히 철폐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민경훈 미주본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