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 5월 ‘노무현 퍼즐게임’이라는 칼럼을 썼다. 글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이런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퍼즐게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지 100여일 되던, 생애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반미적 좌표’를 맴돌던 그가 ‘친미의 옷’으로 갈아입고 귀국했다 해서 그 ‘변신’을 놓고 일대 찬반이 요란하던 때였다.
나는 그 글에서 노 대통령의 내재적 특성을 두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하나는 ‘승부사 기질’이요, 다른 하나는 ‘상황론적 무한변신’이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쟁취하기 위해 ‘큰 판’에 승부를 걸어온 그의 지난 역정과, 더러는 좌절했지만 궁극적으로 더 큰 것을 쟁취하는데 성공한 ‘노무현 식 게임법칙’ 말이다. 또 눈앞에 닥친 여러 상황들을 맞을 때마다 변신과 변명을 유려한 달변과 진지한 표정까지 담아내는 그의 천부적 자질도 적시했다.
그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지금, 불행하게도 나의 예견은 적중했다. 그가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그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경악, 그 자체였다. 5년 임기 중 겨우 여덟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최악의 경우 대통령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올인 게임’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자신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한 청와대 비서가 부정한 일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신문보도를 통해 보고 눈앞이 캄캄했다면서 정권의 도덕성이 무너진 마당에 더 이상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충격적인 제의를 한 다음, 그의 장기이기도 한 말솜씨가 다음 날부터 어지럽게 이어졌다. 야당과 일부 언론의 국정 발목 잡기가 신임을 묻게된 주요한 이유라고 말을 바꿨다. 장관 불신임과 감사원장 임명 거부를 ‘국회의 발목잡기’로 비난하면서 아주 처연한 표정을 짓는 걸 잊지 않았다. 여기에는 필연코 곡절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인기는 바닥(16%)이지만 국민투표에 붙이면 재 신임하겠다는 여론이 절반을 넘는다는 희소식이 회심의 반전에 나서게 된 동기였던 것 같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초장부터 우왕좌왕 뒤뚱거렸다. ‘이게 웬 떡이냐’면서 ‘하려면 빨리, 그것도 객소리말고 국민투표로 판가름 내자’고 서둘렀다. 한데 웬걸, ‘그래 올 안에 국민투표로 하자’는 반격을 받고서야 ‘덫에 걸렸다!’며 부랴부랴 뒷걸음질쳤다. ‘노무현당’으로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통합 신당’도 ‘임기를 장장 4년 반 남겨두고 무슨 소리냐? 절대 안 된다’고 길을 막아서더니 노 대통령의 다음 날 발언 뒤 입장을 뒤집었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주당이 ‘국민투표 반대’를 초장부터 들고 나온 것은 한나라당이나 신당에 판을 깔아주면 낭패라는 계산을 처음부터 잘 헤아린 탓이었다. 자민련이라는 소집단의 수장인 JP(김종필)가 ‘아예 하야하라!’고 볼멘 소리를 지른 것 또한 국민투표 바람이 불었다가는 알량한 8석의 국회 의석도 날아간다는 뼈아픈 현실을 내다본 때문일 것이다.
4당4색의 복잡한 양상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야당 우세, 노 대통령 수세’로 반전되는 듯하다. 세 야당이 일단 대통령 주변 비리 파헤치기로 뜻을 합한 때문이다. 어떤 쪽이 뭐라 하든 국민들은 나라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무슨 묘책이 있겠는가. 있다해도 이쪽 저쪽 이해가 맞지 않을 게 뻔한 판에 어느 세월에 결판이 나겠는가. 지금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는 말 그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먼저, 현행 헌법상 ‘위헌’ 소지가 농후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덜컥 투표를 강행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의 유권해석을 받은 뒤 실시하는 게 백번 옳다. 대통령이 바뀌느냐 마느냐는 중대문제를 건 투표가 위헌 판정이라도 받으면 이는 국가의 대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신임투표에 대한 헌법 해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순리다. 그 기간 동안 대통령 스스로가 ‘눈앞이 캄캄했다’고 술회한 측근의 부정 비리, 그리고 ‘문제의 돈(11억원)이 노 대통령 지갑으로 흘러들어 갔을지 모른다는 의혹’(야당 주장)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는 게 당연한 순서다. 이를 위해선 특별검사를 임명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지휘 아래 있는 법무장관과 그 수하의 검찰이 성역 없는 수사를 하기는 어렵다. 노 대통령도 ‘신임투표를 어떤 정략적 국면 전환용으로 제안한 게 아니라’고 했으므로 자신의 결백이 증명된다면 굳이 신임투표를 하지 않고도 국정을 리드해 나갈 수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나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매우 유능한 대통령이었다. 검은 돈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재선기반을 다지기 위해 상대 당을 염탐하고 거짓말을 해댔다.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사과했다면 중도 퇴임이라는 치욕을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특별검사의 수사와 의회 탄핵과 미 국민의 노한 함성에 침몰돼 백악관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이 아니다. 법도 여론도 다르다. 한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이 하나 있다. 노 대통령의 승부게임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더 이상 노동 변호사도, 반독재 투쟁가도 아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아닌가. 승부사로 남아 정치실험을 계속한다면 나라는 정말 결딴나고 말 것이다.
(안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