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할리웃의 명배우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선 슈워제네거가 유세도중 한 청중으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았다. 상의에 묻은 노란 액체를 대충 닦아내고 연단에 오른 그의 일성이 걸작이다. “이제 베이컨만 던지면 제격이네요.” ‘베이컨 앤 에그’(메뉴)를 빗대어 멋진 개그를 한 것이다. 청중은 박장대소했고 그는 곤궁한 처지를 잘 넘겼다.
시간대로는 비슷한 때, 한국하고도 서울의 북악산 기슭에 버티고 있는 청와대에선 모처럼 여야 정치인들이 마주 앉아 ‘국사’를 의논하는 기특한(?) 모임이 있었다. 얼굴도 마주 대하기 꺼리며 으르렁대던 양쪽이 나라 걱정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니 기특하지 않은가. 그런데 마음을 모으기 보다 얼굴을 붉히고들 일어섰다.자리를 같이 한 5명의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국가 대권을 한 손에 움켜 쥔 노무현 대통령, 3권 분립을 외쳐보지만 역부족인 박관용 국회의장, 국회 제1당, 그러나 내부 입지가 허약해 보이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몸담고 있는 당이 난파한 데다 본인도 불법 정치자금으로 궁지에 몰린 정대철 민주당 대표, 굽이굽이 역대 정권마다 협력자로 정치곡예를 멋들어지게 구사해 온 덕분에 부귀영화를 누려 온 김종필 자민련 대표--모두 한가락하는 한국 정계의 거물들이다.
나는 이들의 모임과 거기서 오고간 국정토론에 대해 논평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나의 눈길을 끈 대목은 노 대통령과 최병렬 대표간에 오간, 그것도 아주 짤막한 한 토막의 대화다. 노 대통령이 일부 비판 언론과 야당 의원을 걸어 고소한 것을 놓고 두 사람간에 오간 대화는 이렇다.
먼저 최 대표가 포문을 열었다. “(대통령이) 언론사와 야당 의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는데, 대통령은 나라의 어른 아닙니까? 어른답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을 노무현 대통령인가. 이내 반격이 가해졌다. “언제 (나를) 어른 대접해 주셨나요?” 그 말 뒤에 “언론도 잘못 보도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고 덧 붙였지만 노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앞부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속내는 목하 열불이 나 있을 게 틀림없다. 야당과 보수 언론이 한통속이 돼 자기가 하는 일마다 걸고 넘어진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판에 ‘밉살스럽기 그지없는 언론’편을 들고 있으니 속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게다가 ‘대통령은 나라의 어른이라’며 병 주고 약주는 최 대표의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성싶다. 그래서 나온 말이 ‘언제 나를 어른으로 대접해 주었느냐’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실은 반격이다. 역시 그다운 순발력이 돋보이는 대응이다. 아마도 그는 더 심한 표현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봐 달라할 때는 나를 어른으로 추켜세우고, 평소에는 정치 후배로 깔보는 것 아니오?”
그 자리에 모인 면면을 보건대 누구도 노 대통령을 내심 ‘나라의 어른’으로 보지도 대접하지도 않았음은 꼭 대통령 자신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대충 짐작이 가는 바다. 노 대통령이 20여년 전, YS에 의해 정계에 입문할 초년병 시절, 참석자들 모두가 정치 대선배로 ‘초선의원 노무현’의 어깨를 툭툭 치던 입장들이었다. 그 가운데 JP로 치자면 더 말할게 없지 않은가.
내년 총선에서 10선을 바라보는 노욕에 불타 혹여 권력에 데일라 몸을 잔뜩 낮추고 눈치를 보는 노회한 70 정객을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그러니 노 대통령이 ‘나라의 어른’으로 존경받기는 이래저래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야 어떻든 그가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우뚝 서는 정치를 해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천만 유감이지만 그렇지 못한 데 더 큰 이유가 있다.
‘어른’이란 표현은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 앞에 ‘나라를 대표하는’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그것은 곧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 반열에 드는 인물을 일컫는다. 아무리 후하게 평하더라도 노 대통령의 지금 입지는 거기서 꽤나 멀다. 취임 초기 인기가 20% 대에 머문 대통령은 그가 최초다.
노 대통령이 정말 나라의 어른으로, 노회한 정치인들로부터가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꼭 가야 할 길이 있다. 가장 급한 것은 말과 처신을 조심하는 일이다. 달변, 임기응변, 토론의 달인이라는 말은 이제 칭찬이 아니다. 대통령의 말은 국민 마음에 와 닿는 신뢰와 무게가 있어야 한다. 거친 표현은 품위를 잃게 한다. 한 말은 세상 두 쪽이 나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인내심을 쌓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도 야당 대표로부터 기분 상하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반격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그 근육질의 터미네이터가 달걀 공격을 받은 뒤 연단에 올라 윗통을 벗어제치고 “내게 달걀 던진 사람 이리 나오시오!”하고 소리쳤다면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틀림없이 ‘우-!’하며 야유를 던졌을 것이다. 같은 논리가 노 대통령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야당 대표로부터 ‘어른답지 못하다’는 뜻으로 공격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대꾸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야말로 ‘어른들’이라고 믿어왔는데--이제 저도 그 반열에 올려 주신다고 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이 대거리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안영모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