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오고 세상을 떠나는 일은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고, 자살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죽는 시기를 조절할 수 없다. 인간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과정’뿐이다. 그래서 각자 주어진 능력과 여건에서 ‘과정’을 빛내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으며, 역사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에 주목받는 LA평통도 삶의 법칙과 흡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평통은 80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함께 태동했고 7년 뒤 민주평통으로 개명되면서 해외지부가 탄생한 것이니 LA평통위원들이 한 일을 전혀 없다. 무용론이 힘을 얻어 폐지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평통위원들이 어찌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평통의 시작과 끝은 위원들의 의지와 무관하다. 그러니 위원들이 할 일은 ‘과정’에 충실하는 것뿐이다.
지난 주말 평통위원들이 신년하례식을 갖고 남북화해와 교류에 힘을 보태자고 다짐했지만 포부와 청사진은 해마다 내던지는 하나의 의례에 불과하다. 새해를 맞는 통과의식에 그치지 않고 이렇다할 결실을 맺으려면 쉽게 깨지는 ‘금주, 금연, 살빼기’ 계획을 닮아선 안된다.
지금은 바로 평통이 인정받을 수 있는 적기다. 냉각기이긴 하지만 남북문제는 여전히 살아있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기에 따라서 그 공적이 더욱 부각될 수 있는 상황이다.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의 열쇠의 손잡이는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조여대자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를 비틀어버렸다. ‘남대문’에서 뺨맞고 ‘동대문’에서 화를 낸 것이다. 김-김 정상회담을 전후해 흥분해 하던 남한은 요즘 뒷짐진 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신세가 돼버렸다.
LA평통의 잠재력은 이같은 역학구도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위원들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으니 적절한 채널로 결집된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다. 또 북한의 입장에서 남한보다는 미주한인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덜하며, 북한은 올해 김일성 전 주석의 90회 생일과 건국 70주년이 겹쳐 대외적으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펼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신임 회장은 선임과정에서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고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건립을 성사시킨 점을 고려할 때 단합과 추진력에 있어서 기대를 모을 만 하다. 이같은 ‘트리플 호재’를 잘만 활용하면 올해 남북화해의 가교역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방의회를 통과한 미주한인 이산가족 상봉결의안이 가시화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뛰어야 한다. 주류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홍 신임회장을 필두로 250여 위원들이 중지를 모아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고 시행될 수 있는 세세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각 분과위별로 전문성을 살려 영향력 있는 각계 인사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 부시행정부의 대북한 강경책의 부작용을 주류사회에 홍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북한이 고질적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주한인사회와의 교류를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평통은 민간기구는 아니지만 북한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단체 등과 협력해 북한주민들에게 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측면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인사회와 북한의 교류활성화는 점진적으로 북미교류와 남북교류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평통은 한국정부가 듣기 싫어할 말이라도 눈치보지 말고 당당히 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 임기 중 큰 수확을 거두려 과욕을 부리지 말고, 미국과 북한 사이의 마찰을 줄이는 윤활유가 될 것을 촉구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 통일정책 세미나를 자주 열어 평통위원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작업이 선행돼야 함은 당연하다.
다음 정권도 그 골격을 유지하면서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대승적인 정책을 펴야 함을 강조하고 장관 바뀔 때마다 옷을 바꿔 입는 교육정책 꼴이 되면 남북관계는 망가지고 말 것이란 점을 상기시켜야 한다. 민족의 대사인 남북문제를 ‘한건주의’에 입각해 접근하면 죽도 밥도 안될 터이니 말이다.
올해는 ‘하는 일없이 폼만 잡는 평통’이란 인식을 씻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성공여부는 회장과 250여 위원들의 진지한 자세와 구체적인 행동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