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 한국인 이름을 딴 유길준 한국 박물관을 세우기로 한 피바디 에섹스 뮤지엄은 가장 오래된 한국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뮤지엄 소장 사진을 보며 선각자들의 발자취와 한국인에게 있어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 본다.
<민경훈 편집위원>
2002년은 임오년이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교한 것도 임오년이다. 한미 관계는 이미 60갑자를 두 번 지낸 셈이다.
2003년 이민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 사업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지만 한국인으로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사람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온 이민자들이 아니다. 1883년 고종의 명을 받고 전권대사로 미국에 온 민영익을 비롯한 사절단이 그들이다.
그 중 한 명인 유길준은 사절단을 따라 돌아가지 않고 보스턴에 남아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서양 문물을 배우겠다는 결심에서였다. 미국은 한국에게 이민의 땅이기에 앞서 선진문물의 학습장이었던 셈이다.
27살에 조선 최초의 신문사 편집국장이 될 뻔 하다 정부의 발간 금지조치로 꿈이 깨진 유길준은 미국에 오기 2년 전 25살 때 일본 게이오 대학에 머물며 일찍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을 공부했다. 그의 일본어 실력은 수준 급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이 때다.
유길준이 뉴욕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보스턴에 도착한 것은 그 해 11월 9일이다. 피바디 뮤지엄 관장이자 그의 스승이었던 에드 모스가 그를 맞아 자기 집으로 인도했다. 동네 신문인 세일럼 이브닝 뉴스가 한국인 유길준이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먼 나라 조선의 사절단원 출현은 뉴스거리였던 모양이다. 내셔널 리퍼블릭컨지는 그가 "잘 교육 받았고 위트가 있으며 관찰력이 뛰어났다"고 보도했다.
그는 대학 예비학교인 더머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했다. 그러나 다음 해 갑신정변으로 후원자인 민영익 일파가 몰락하면서 그는 하버드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겠다던 뜻을 접고 귀국하게 된다.
유길준은 이곳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한복을 벗어 던지고 양복을 입었다. 그가 벗은 한복은 비파디 뮤지엄에 보관돼 있다. 사전도 문법책도 없었을 시절 그가 독학으로 배운 실력으로 쓴 영어 편지도 남아 있다. 스펠링도 문법도 거의 오류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서양문물을 소개한 ‘서유견문’을 쓴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인들은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여성들은 아름답다. 야만인처럼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지만 교육수준은 높다. 남성들은 애국적이지만 복장에 너무 관심을 쏟고 여성에게는 하인처럼 비굴하게 군다.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는 매우 좋다. 최고의 정책이다.”라고 27살의 젊은 조선인은 적고 있다.
이민자보다 먼저 미국을 본 사람은 유길준 만은 아니다. 그가 귀국한 1885년에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실패하고 일가족이 몰살당한 서재필이 망명해 왔으며 그 1902년에는 가장 뛰어난 선각자의 하나인 안창호가, 그 이태 후에는 이승만이 조선의 개화와 독립이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태평양을 건넌다. 한국의 선각자들은 미국의 문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경심을 가졌다. ‘도산’이란 호도 하와이를 지날 때 섬 사이로 떠오르는 해의 모습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지은 것이다.
"나는 미국이야말로 인류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만한 위대한 공화국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유럽이나 일본인, 심지어는 무지한 중국인들까지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잘못이라고. 그들이 미국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질투 때문이다."
유길준이 쓴 편지 내용이다. 그 후 120년이 지난 오늘 미국에 사는 한인과 한국의 한국인들은 얼마나 미국을 알고 있으며 알려고 노력하는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