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전 영국총리의 집권 초기인 80년대 초 영국의 경제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2차 대전 이후 취해온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노조의 입김이 거세지고 생산성이 저하돼 인플레가 27%에 달했다. 5대 국영기업의 적자를 집계하니 1주에 1,000만달러를 훨씬 넘었다. 대처는 파업으로 날이 새고 파업으로 날이 지는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강성 노조에 메스를 가했다.
영국 탄광노조는 스카길의 지도아래 1년 넘는 사상 최장의 파업을 계속했다. ‘스카길리즘’으로 불렸던 노조운동은 국민이 나눠야 할 ‘파이’가 매우 제한된 현실을 도외시하고 제 몫만을 강조했다. 노조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근거를 둔 ‘대처리즘’에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으나 한동안 경제를 마비상태로까지 몰고 갔다. 영국 탄광노조는 노조가 집단 이기주의에서 허우적대면 노조원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불 보듯 훤하게 드러냈다.
비슷한 시기인 지난 80년 폴란드의 야루젤스키 공산정권이 식품가격을 올리자 항구도시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이는 금새 전국으로 번졌다. 노동자들은 9월 자유연대노조를 발족시켰고 레흐 바웬사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자유연대노조는 경제적 이슈에서 출발했지만 자유선거, 노동조합의 정책결정 참여 등 사회 전반에 대해 발언수위를 높였다.
독립 노조결성을 승인했던 야루젤스키 정권은 이듬해 소련의 지시에 따라 자유연대 노조를 불법화했지만 자유연대 노조는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지하활동을 계속해 마침내 정부와의 협상을 이끌어냈고 89년 4월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자유선거 참여를 허용하는 포괄적인 협정체결과 함께 89년 첫 자유선거에서 자유연대 노조는 공산당을 누르고 바웬사 위원장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유연대 노조는 폴란드 민주화는 물론 동구권에 불었던 자유화 바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유연대 노조는 노조의 잠재력이 사회 변혁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었다.
영국의 탄광노조는 구태의연했으나 폴란드의 자유연대 노조는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탄광노조원들은 ‘작은 나’에 집착했으나 자유연대 노조원들은 ‘큰 우리’를 위했다. 탄광노조원들은 회사는 쓰러져도 ‘제 것 챙기기’에 급급했지만 자유연대 노조원들은 목숨걸고 사회정의를 외쳤다. 자유연대노조원들의 투쟁은 "건강한 나라 없이 자유노조도 없다"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였다.
여행길 비포장 도로를 주행하던 차의 네 타이어 중 하나가 "길에 깔린 돌 조각 때문에 몸이 아파 더 이상 굴러갈 수 없다"며 주저 않으면 다른 세 타이어가 아무리 참고 달리려 해도 차는 나아갈 수 없다. 이처럼 내 뜻만을 고집하면 공동체 대의를 망치고 만다.
직원 290여명의 한국 중소기업이 해양 케이블과 선박용 전선 분야에서 지난 94년부터 7년째 세계 일류를 고수하고 있어 최근 화제가 됐었다. 대기업인 일본의 미쓰비시를 가격과 기술에서 제친 이 회사의 경영진은 그 공로를 온전히 노조에 돌렸다.
노조원들은 언제나 회사 전체를 염려했고 경영진은 직원들을 ‘내 식구’로 여겼다고 한다. 노조는 회사측으로부터 얻어낼 것을 궁리하는 대신 회사의 성장을 위한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열중했고, 경영진은 직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단다. 그러니 국내외에서 400여건의 품질인증을 받고 지난 한해동안 13개의 기술특허를 따낸 것이 당연한지 모른다. 노사가 회사의 발전에 합심한 결과였다.
지난주 LA 한인사회 대형업체로선 처음으로 아씨마켓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 법적 절차가 남아있지만 그 파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노조가 마켓에, 나아가 업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는 노조원들과 이를 대하는 경영진에 달렸다. 노조원은 회사를 키우는데 진력하고 경영진도 노조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여야 한다. 서로를 경쟁상대가 아닌 동반자로 여기는 공동체 의식만 있다면 노조는 손실보다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