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 종류의 알람

2001-11-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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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론트라인

▶ 박봉현 편집위원

창문을 꼭 닫은 채 개스레인지로 생선을 구우면 온 집안이 연기로 가득 찬다. 잠깐 다른 일에 정신을 팔다 보면 생선이 타게 되고 자욱해진 연기가 천장에 설치된 알람을 자극한다.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불이 날 정도로 긴박한 상황도 아니지만 알람은 연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도 이 알람은 "왜 그토록 시끄럽게 울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준다. "개스레인지 위에서 생선이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아울러 앞으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알람은 이렇게 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레이 데이비스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지난 1일 알람을 울렸다. "믿을 만한 정보"에 근거해 약 1주간 금문교 등 주내 명물인 교량 4곳을 타겟으로 한 후속테러 가능성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게다가 시간도 러시아워 때라고 첨언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경고를 접한 주민들은 놀라긴 했지만 이들 교량을 이용할 것인지 여부는 자율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테러가 일어날 것으로 여기는 주민은 불편해도 지하철 등 다른 교통편을 강구하면 되고, 그 반대 입장의 주민들은 눈 깜짝하지 않고 다니면 된다. 걱정은 되지만 주정부의 명쾌한 태도에 마음은 시원하다. 만일 쉬쉬하면서 교량 근처에 방위군을 대거 배치했더라면 교량을 넘나드는 수많은 주민들에게 의혹만 심어주고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정부의 알람은 경고다운 경고를 했다.

이에 비해 연방정부의 알람은 형편없다. 연방정부는 9월11일 테러참사 이후 10월11일, 29일, 11월3일 세 차례에 걸쳐 테러경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상이나 일시 등에는 묵묵부답이었다. 미국 본토인지, 외국내 미국 시설인지, 수일 내인지, 수개월 내인지 전혀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언제 어디서 발목을 삘지 모르니 하루종일 조심조심 걸으라는 식이다. 잔뜩 공포 분위기만 조성했다.

뉴욕테러가 나기 전 이에 대한 정보를 소홀히 다뤘다는 비난이 일었던 것을 감안해 애매한 정보에도 일단 경고를 내는 오버액션이라는 인상이다. 가만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화살의 표적이 되니, 확신이 없어도 알람을 울리고 보자는 면피성 행정으로밖에 볼 수 없다. 테러가 발생하면 ‘족집게’로 평가될 게고 아무 일 없으면 적절한 경고로 테러를 막았다고 자화자찬할 수 있으니 이래저래 밑지는 장사는 아니란 판단이 섰는지 모른다.

하지만 경고 내용이 하도 흐릿해 각 지역 치안당국조차도 주민 안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정쩡한 자세다. 소리만 요란했지 구체적인 것이 없다는 게 대다수 주민의 불만이다. 나름대로 일정한 정보를 바탕으로 경고를 했겠지만 그 때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이솝우화 ‘양치기 소년과 늑대’에 나오는 비극이 초래되지 말란 법도 없다.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 늑대 이야기로 주민들을 속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두루뭉실한 경고를 남발하면 신뢰를 잃게 마련이다.

지난 일요일 가족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 영화관에 갔다. 평소 주말 같으면 사람들로 북적대 이리저리 비켜가야 하는 곳인데 이날은 비교적 한산했다. 당초 제트 리 주연의 ‘아이언 멍키’(Iron Monkey)를 보기로 하고 표를 구입했으나 "중국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란 말을 듣고는 아이들이 변심했다. 몇분간 긴급 가족회의 끝에 제트 리 주연의 다른 영화 ‘더 원’(The One)으로 낙착했다.

다시 매표소로 가 줄을 섰지만 사람이 별로 없어 수월하게 표를 바꿨다. 예매하지 않고 새 영화를 보려면 몇 시간 기다리는 게 통례인데 이날은 예외였다. 눈대중으로 인파가 3분의2 정도는 줄어든 것 같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위험하다는 연방정부의 막연한 테러 경고 여파가 이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찌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노리는 게 바로 이처럼 알맹이 없는 경고에 미국이 쩔쩔 매는 모양이 아닌가 싶다. 테러경고에 있어 주정부보다 못한 연방정부가 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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