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멘터리 21/번지는 증오범죄>
▶ <박봉현 편집위원>
총·칼·사제폭탄 공격에 무방비로 억울한 희생
고교생·교수·경관·75세 노인도 가세한 사회병리
자극적 언행 삼가고 자숙하는 분위기 견지해야
’또 다른 테러’인 증오범죄가 미국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뉴욕테러 사건이 발생한 9월11일부터 9월30일까지 LA시 139건을 포함해 캘리포니아에서만 230여건이 발생했다. 탄저균만 막을 게 아니라 요동치는 ‘증오의 물살’도 경계해야 한다.
증오범죄는 막기가 어렵다. 사용되는 무기가 워낙 다양해 미리 감을 잡고 방어태세를 갖추기가 곤란하다. 전화로 손쉽게 위협할 수 있다. 미주리 캔사스시티의 이슬람 학교 2곳이 보복위협 전화로 임시 휴교했다. 텍사스의 아랍계 부동산 에이전트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다.
총·칼은 물론이고 사제폭탄·화살까지 등장한다. 인디애나 덴톤에서는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성이 예멘 출신이 일하는 주유소에 총격을 가했다. 나이트클럽을 나오던 보스턴 대학의 아랍 학생도 3군데나 자상을 입었다. 한 이슬람 가정 창문으로 개솔린 폭탄이 투척돼, 터지진 않았지만 세살배기 아이의 머리에 떨어졌다. 힌두교 사원에도 몰로토프 칵테일 공격이 있었다. 플로리다 그린코브의 무슬림 세탁소에는 현관 창문으로 화살이 날아들어 세탁기에 맞았다.
공·방망이·병·돌도 동원된다. 풀러튼에서는 한 주민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작은 트럭을 몰고 다니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한 시크교도를 동네에서 쫓아버렸다. 그리스 식당은 소프트볼 세례로 창문이 박살났다. 프레몬트의 아프간 식당은 병과 돌 세례를 받았다. 아랍계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 창문으로 벽돌이 날아들기도 했다.
육탄공세도 있다. 일리노이의 40대 여성은 주유소에서 개스를 넣던 아랍계 주민에게 대들고는 그의 차를 가로막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차량과 몸을 병용하기도 한다. 새크라멘토의 한 남성은 시크교 사원이 테러 희생자를 애도하는 반기를 게양하지 않자 자신의 트랙터와 트럭으로 사원 입구를 막은 뒤 인도에서 직송된 성수를 더럽힐 심산으로 풀에 뛰어들었다.
페인트·쓰레기·침까지도 무기로 둔갑한다. 뉴저지에서는 시크교도의 차가 쓰레기를 뒤집어썼다. 워싱턴 린우드의 회교 사원엔 온통 페인트가 뿌려졌다. 한 백인 남성은 지하철을 타고 가던 아랍계 여성 2명에게 침을 뱉었다. 텍사스대에서 중동언어 및 문화를 가르치는 한 교수도 길을 가다 똑같은 봉변을 당했다. 언제 어떤 형태로 돌진해 올지 모르는 게 증오범죄다. 가해자가 마음만 먹으면 무기는 도처에 널려 있다. 가만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증오범죄는 무섭다.
증오범죄는 대상이 불분명해 불특정 다수를 떨게 한다. 결국 가증스럽게도 억울한 희생양을 양산한다. 앨라배마의 아랍계 점원은 테러리스트와 같은 지역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실컷 두들겨 맞았다. 앤틸로프 밸리의 시리아 출신 주민의 가게는 한 주에 2번의 총격을 당했다. 외국 출신은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LA의 병원을 찾은 두 여성이 스패니시로 대화를 하자 옆에 있던 백인 여성이 "너희 외국인들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고함지르며 삿대질을 했다.
샌개브리엘 마켓에서 차도르 차림의 여성이 샤핑 도중 백인 여성에게서 "미국은 백인만이 살 수 있다"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다. 아랍계로 오인 받은 한 여성은 백인 여성으로부터 얼굴에 펀치를 맞았다. 베벌리힐스의 베이글 빵집에서는 코란 구절이 박힌 목거리를 한 여성은 백인 여성의 경멸스런 언동을 감내해야 했다. 뉴욕의 아랍계 택시운전사는 차에서 끌어내려져 구타당했고, 다른 택시운전사는 요금을 받기 위해 뒤로 손을 내밀다가 손님에 의해 팔이 부러졌다.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인도 사람들도 표적이 된다. 인도 유학생의 차가 박살났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남성은 인도 여성과 데이트를 하다, 이 여성을 아랍계로 잘못 보고 달려든 백인의 칼에 찔렸다. 샌호제의 인도인 주거지에서는 뉴욕테러 이후 14건의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을 아랍계로 착각해 불을 지른 것이다.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은 방어벽을 쌓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다 어처구니없는 기습을 당하니 황당하고 분통 터질 일이다. 이 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증오범죄는 무서운 것이다.
증오범죄의 가해자는 이마에 무어라 써놓고 다니지 않는다. 나이와 직업, 신분도 다양하다. 어찌 보면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이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고희가 넘은 노인도 ‘증오의 물결’에 올라탄다. 뉴욕 헌팅턴에서는 75세 할아버지가 술을 마신 뒤 샤핑몰 주차장에서 파키스탄 여성을 치어 죽이려 했다. 여성이 도망가자 가게 안까지 쫓아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청소년·대학생·교수도 손을 더럽힌다. 애나하임에서는 청소년 셋이 스케이트보드로 마켓 창문을 부쉈다. 우드랜드힐스 피어슨대의 백인 학생 2명이 아랍 학생회관에 "죽어라"는 단어를 쓰는 바람에 아랍 학생들과 다툼이 있었다. USC에서도 아랍계 학생들이 손가락질을 당했다. 오클랜드 래니대에서는 한 교수가 강의실에서 아랍계 학생에게 이슬람에 대해 폭언을 하자 이 학생이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직장 동료·경관·교도관도 가세한다. 증오범죄까지는 아니라 해도, 뉴욕주 록랜드의 아랍계 여성 텔러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과 비난에 시달렸다. 증오범죄를 엄단해야 할 공권력이 되레 가세하기도 한다. 펜실베니아의 한 비번 경관은 파키스탄 편의점에 들어가 주인에게 총을 겨누며 겁을 주었다. 미시시피에서는 테러관련 용의자로 체포 수감된 파키스탄 출신 대학생이 다른 죄수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으나 간수들이 이를 묵인했다
고 폭로해 연방수사국이 조사에 나설 정도로 사태가 번졌다. 증오범죄는 흉악하다. 대체로 경고와 협박으로 시작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베트남전 출신 베테런은 애리조나 투산에 있는 회교 사원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며 긴장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도 온건한 편에 속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주민은 이슬람 커뮤니티 센터의 현관에 돼지 피가 담긴 가방을 갖다 놓았다. 얼마 전 한국인 몇 명이 일본의 정책에 반대해 손가락을 잘라 보낸 것과 유사하다.
글렌데일 캘러리아 샤핑몰 주차장에서는 파키스탄 주민의 차 오른쪽에 "핵무기로 공격하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LA 시청의 엘리베이터에는 회교도들이 머리에 쓰는 터번을 지칭해 "타월 헤드를 모두 죽여버려라"는 섬뜩한 표현도 있었다. 살해위협은 그래도 낫다. 실제로 애꿎은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애리조나 메사의 시크교도는 자신의 주유소에서 피격 사망했다. 캘리포니아 프레스노의 한 예멘 출신 상점주인도 총성에 갔다. 재산상 피해는 억울한데 생명까지 잃게 되면 그 친지들은 이 사회를 저주할지 모른다.
증오범죄는 미국을 병들게 한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간과의 싸움이라지만 ‘증오와의 전쟁’은 시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더 이상 확산되기 전에 가해자를 엄벌해 조기 수습해야 한다. 뉴욕테러 이후 증오범죄를 당한 한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100% 풀어서는 안 된다. 증오범죄를 막는 뾰족한 수는 없지만 사회 분위기에 배치되는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고 당분간 자숙하는 태도를 갖는 게 한 방법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