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LA필 새 시즌

2000-10-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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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 박흥진 편집위원

요즘 베벌리힐스나 센추리시티를 지나다 보면 가로등에 ‘나를 변화시킨 음악’이라는 글귀와 함께 정장을 한 남자가 마치 아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즐기듯 여러 가지 포즈로 첼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담긴 깃발이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매주 일요일 오후 4시에 클래시칼 뮤직 전문방송인 K-Mozart(FM 105.1)를 틀면 LA필의 단원이 출연, 자신의 이 교향악단과의 경험과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얘기와 함께 LA필의 금년 시즌 프로그램에서 고른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바야흐로 클래시칼 뮤직의 제철인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LA필의 제82회 시즌이 되는 2000-2001시즌은 지난 6일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으로 시작돼 내년 5월27일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으로 끝이 난다.


현재 안식년 휴가로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는 LA필의 상임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은 지난 4월 LA필의 가을/겨울시즌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이번 시즌은 새 천년의 종말과 시작의 분기점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는 생애 단 한번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따라서 이번 시즌에는 갈등과 평화, 죽음과 재탄생 그리고 염세주의와 희망의 주제들로 연결된 바로크 뮤직에서부터 20세기 후반의 음악들이 광범위하게 연주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시즌의 괄목할 만한 프로그램들로는 내년 봄 3주간에 걸쳐 연주될 스트라빈스키 축제와 아론 코플랜드와 쿠르트 바일 및 호아킨 로드리고의 탄생 100주년 기념 작품연주와 함께 번스타인의 사망 10주년과 바하의 사망 250주년을 맞아 각기 연주되는 ‘제레마이아’교향곡(10월27, 28, 29일)과 ‘마태 수난곡’(4월13, 14일) 그리고 브리튼의 거대한 ‘전쟁진혼곡’(10월19, 21, 22일) 및 말러의 장엄한 ‘부활’교향곡(10월24, 25, 26일) 등이 있다.

또 LA필과 친숙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존 애담스가 자기 오페라 작품인 ‘중국의 차이나’발췌곡을 연주하고 오는 22일부터 LA 카운티뮤지엄에서 열리는 ‘캘리포니아산: 미술, 이미지, 그리고 정체성 1900-2000’ 전시회에 맞춰 캘리포니아서 활동한 음악가들인 애담스, 쇤버그, 코플랜드,루 해리슨 등의 작품도 연주된다.

객원지휘자들로는 신시내티 심포니의 새 상임지휘자 파보 예르비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새 상임지휘자 프란즈 뵐저-뫼스트 및 함부르크의 NDR 심포니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에센바하 등이 있다. 그리고 객원연주자들로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첼리스트 하인리히 쉬프, 바이얼리니스트 길 샤함 등이 LA를 찾는다.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 바이얼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 핀카스 주커만 등이 출연하는 명사 시리즈중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의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가 내년 3월8일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 무대에 선다는 것.

안식년 휴가중 지난 6일 LA필의 새 시즌을 열기 위해 잠시 휴식을 중단하고 뮤직센터 무대에 오른 살로넨은 이날 독특한 연주방법을 택했다. 쇤버그의 8분짜리 ‘바르샤바의 생존자’(A Survivor from Warsaw)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을 중간휴식 없이 잇달아 연주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경험이었다.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합창이 있는 소품 관현악곡인데 이는 나치 점령하 바르샤바의 하수구에서 숨어 지내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경험을 그린 작품이다. 해설은 TV 공상과학 시리즈 ‘스타 트랙’의 닥터 스폭으로 유명한 레너드 니모이가 맡아 유대인들의 고통을 절규하듯 들려줬다.


이런 고통과 생존의 경험은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합창’교향곡은 인간성의 승리를 노래한 작품인데 그것이 귀가 완전히 먹은 베토벤이 온갖 재앙에 시달릴 때 작곡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 음악은 하나의 정신으로 합쳐진다고 하겠다

리스트도 말했듯이 이 교향곡은 암흑과 빛이 강렬히 교차하면서 베토벤의 절망과 이를 초극한 인간노력의 보다 고매한 목적을 대변하고 있는데 4악장의 쉴러의 ‘환희의 송가’와 함께 하늘로 오르는 베토벤의 정신과 접촉하면서 우리는 선험적 경험을 갖게 된다.

살로넨이 두곡을 쉼없이 연주한 것도(교항곡 2악장 후 잠시 휴지) 바로 이런 감정의 강렬성을 중단시키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곡이 끝나자 청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와 환호성으로 오래간만에 만난 LA의 총아 살로넨에게 감사를 표했고 살로넨은 늘 하듯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놓으며 답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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