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고마워 할줄을 몰랐다

2000-10-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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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1.5세가 교도소에서 보내온 편지

▶ 데이빗 이

데이빗 이씨(31)는 뉴욕거주 한인 1.5세로 한인 갱에 가입, 활동하다가 중범죄 유죄판결을 받고 연방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 이 글은 교도소에서 개과천선, 새 사람이 된 이씨가 한인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체험담을 기록한 편지다.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기사를 읽고서 그들이 그동안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살면서 겪었을 아픔과 고통이 이해가 갔다.

나 자신 7년째 연방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물론 그들이야 선택의 여지없이 그같은 운명을 겪게 된 것이고 나는 뉴욕시의 악명 높은 아시안 갱에 스스로 가담했던 결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는 차이는 있다. 나는 24세 때 교도소에 들어와서 그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었다. 교도소는 나를 처음부터 무너뜨렸다. 나의 자긍심, 태도, 심성 그리고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뜻이다.

나는 뉴욕에서 살면서 미국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고마워할 줄 몰랐다. 좋은 동네 좋은 집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들과 살았다. 다복한 생활을 영위했으나 결코 만족해 본 적이 없다. 전형적 미국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마치 자전거나 자동차를 처음 샀을 때는 좋아하다가도 세월이 흐르면 싫증을 내는 것처럼 그랬다. 삶의 변화를 원했다. 아무 것도 없던 과거는 까맣게 잊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롭고 더 나은 것을 가지려고만 했다.


물질, 신분, 부, 특혜, 권력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더 가진 자와 비교하고 부러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보다 못 가진 자들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이 못 가진 것을 자신이 갖고 있는데 대해서 감사하는 대신에 말이다. 나는 감방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존중하는 도덕기준을 갖지 않은 인간들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음식이 그립고 가족들과 함께 -특히 명절날- 식사를 하던 때가 그립고 내 집 내 침대에서 자던 안락함이 그립다. 내가 누렸던 프라이버시가 그립다. 내 삶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모두 그립다. 무엇보다도 내 가족들이 그립고 그들과 같이 했던 시간들이 그립다.

이런 일들은 모두 내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나의 가족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아파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곁에 달려가 도울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이 겪는 가장 참기 어려운 일중 하나다. 다른 수감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달려가 손을 잡고 임종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을 봤다.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그런 경험은 아직 없으니 하느님에게 감사해야겠다.

교도소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한인들은 결코 이런 생활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한인 청소년들을 위해 내가 겪고 있는 생활을 설명함으로써 나처럼 교도소 담장에 갇혀 일상의 고마운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권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겪은 일들을 알려줘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자고 하지만 물론 내가 그들에게 강제로 듣게 할 수는 없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옛말을 안다.

한차례 절망을 겪고 인간 본성의 함정을 깨닫고 나서 나는 하느님에게 귀의했다. 기독교인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기독교는 나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하느님은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이용하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많은 한인들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이 한국전쟁 기간 또는 한국에서 살면서 결코 누릴 수 없었던 것들을 누리면서도 고마워 할 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미국 땅에서 갖는 많은 기회와 남북한의 우리 형제들이 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누리는데 대해 하느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부모 조부모가 미국에 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그들이 한국에서 누리지 못했던 기회와 특권, ‘아메리칸 드림’을 물려주기 위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미국에 온 것이 한국 문화와 관습을 버리려던 것이 아니라 미국 속의 한국인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경험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민족 문화를 무시하고 우리의 관습을 버리거나 우리가 누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코리안의 피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인처럼 살아가고 미국인이 되길 바라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이 사회에서 코리안으로 간주된다. 이는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교도소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흑인, 라티노, 백인 수감자들은 모든 동양인을 ‘치노’라고 부른다. 그들이 치노라고 부를 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이 왜 대답 않느냐고 물으면 "나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들은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네가 콜롬비아인인데 멕시코인이라고 하면 좋겠냐"고 되묻는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나는 오늘 감방에 앉아서 바깥 돌아가는 소식을 이따금 전해 달라는 내 부탁을 소홀히 하는 옛 친구, 친척들에게 실망하고 있다. 이따금 편지나 사진이라도 한장 보내주면 좋을텐데. 나로서는 다른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감방에 있는 내 몸과 마음은 외롭다. 집에 가고 싶다. 감방의 창문을 내다보면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하느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광경을 언젠가는 하느님이 나의 배우자로 맺어줄 한국 여인과 함께 바닷가에 앉아 감상하는 꿈을 꾼다.

이 글을 읽어준 분들에게 나쁜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말하고 싶다. 여러분이 나 대신 감방에 앉아 있고 나는 밖에서 이 글을 읽고 있을 수도 있다. 자유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기회도 없는 북한 땅 같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껴안을 수도 없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지 말할 수도 없는 채 살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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