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빠의 메뉴

2000-09-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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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삶

▶ 윤병열<한국불우아동 남가주후원회장>

큰아들이 태어나서 이유식의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부터 아빠의 메뉴는 시작됐다. 삶은 감자, 삶은 달걀, 생선묵, 삶은 소고기, 삶은 닭고기, 두부, 시리얼, 당근, 셀러리, 사과, 우유, 꿀 등을 믹서에 넣고 갈아낸다. 소위 육해공군 혼합식 메뉴다. 한끼 분량으로 작은 베이비 푸드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 끼니 때마다 하나씩 꺼내 따뜻한 물에 데워서 가족들이 식사시간 식탁에 앉으면 곁의 하이체어에 아이를 앉히고 숫가락으로 아빠가 떠먹인다.

생후 9개월만에 입양되어온 둘째 아들에게도 그리고 7개월째에 입양되어온 막내 딸이나 똑같이 아빠의 정성이 넘치는 메뉴는 변함없이 되풀이 되었다. 아이들이 커서 태권도 수련에서 늦게 귀가하거나, 외출에서 늦어지게 되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빠가 대부분 밥상을 차리고 식사를 돌봐준다. 마주 앉아 두런 두런 대화도 나누면서-.

우리 가정의 이 전통은 오래 계속되어 오고 있다. 아내가 볼일로 저녁식사 시간보다 늦게 귀가하면 남편인 내가 식사준비를 완료하고 귀가한 아내는 식탁에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된다. 물론, 식사가 끝났을 때 설거지도 대부분 아내를 도와 같이 해낸다. 주말, 무슨 연유에서든 아내가 나보다 늦게 일어나게 되어 식사시간을 맞게 되면 그날 점심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빠가 준비한다.


25년의 세월이 이런 모습으로 흐르다 보니, 이제는 일반 한인가정에서 즐겨 자주 요리하여 먹는 메뉴쯤은 아주 손쉽게 조리할 수 있게 됐다.

지난 몇주 새 아빠가 직접 챙긴 가족의 식단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도가니탕, 가자미튀김, 콩나물 두부국, 어묵볶음, 이면수구이, 김치볶음밥, 만두국, 카레라이스, 김치찌개, 오징어볶음, 낙지볶음, 두부부침, 꼬리곰탕, 갈비탕, 콩나물무침, 칼국수, 멸치볶음, 스파게티, 비빔냉면, 육개장, 불고기, 갈비, 닭찜, 닭곰탕, 닭날개튀김, 등등-.

나를 포함한 한국인 남편들이 결혼생활에서 곧 잘 빠져드는 잘못된 신념중의 하나가 ‘이것은 여자가 할 일, 저것은 남자가 하는 일’이라는 전근대적 가정내에서 남편의 편협한 역활이나 처신에 대한 수칙이다.

남편들이 지금까지 주장해 오듯이 아내나 남편의 역활 중에서 꼭 지켜야 할 그리고 변하지 말아야할 고정적인 행동의 틀이란 없다. 흐르는 물처럼 변화에 부드럽게 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서 포용과 아량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어떨까. 그래야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보살핌, 공평성, 나눔의 원리가 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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