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나기’

2000-09-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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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 박흥진 (편집위원)

산문을 시처럼 쓰는 황순원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글중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단편‘소나기’를 다시 집어들었다. 나는 학창시절 담백한 문장이 좋아 그의 글들을 두루 섭렵했는데 그의 여러 글중에서도 ‘카인의 후예’와 ‘인간접목’및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특히 내겐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보다 순원의 글중 지금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소나기’다. 무척 짧은 글로 단편이라기보다 시라 불러야할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품인데 작품 전체에 센티멘탈리티가 배어 있어 읽으려면 목구멍이 감기증상이 있을 때처럼 간질간질해지곤 한다.

서울서 이북(사투리로 보아 평안도)의 한 마을로 올라온 초등학교 5학년짜리 윤초시네 증손녀와 마을의 동갑내기 소년의 만남과 정듦 그리고 헤어짐을 그린 이 글은 동심과 순수함이 가득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참기 힘들게시리 로맨틱한 사랑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남자가 제일 먼저 이성에 대한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젖먹이 사내아기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 때일 것이다. 이같은 접촉은 ‘소나기’에서 이렇게 깜찍하니 묘사된다.

‘소년이 등을 돌렸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소년은 또 소녀가 산마루께 핀 꽃을 꺾으려다 미끄러져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히자 생채기에 입술을 가져대고 빨아댔다.

‘소나기’는 또 체취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소년과 소녀의 감촉을 접촉 없이 연결해 주고 있다. 수숫단 속 비에 젖은 소년의 몸내음새가 소녀의 코에 확 끼얹혀졌을 때 소녀의 가슴은 소년에 대한 정의 연무로 매캐해졌으리라.

순원의 글은 거의 성적으로 자극적이라고 할 만치 소년과 소녀의 가슴놀이와 접촉과 또 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마냥 흰 소녀의 팔과 목덜미는 눈에 따가운 단풍 철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더욱 곱기만 하다. 그런데 소녀는 볼에 보조개마저 패였으니 소년은 소녀가 얼마나 예뻤을까.

그것이 정인지 사랑인지도 모르는 소년과 소녀의 관계는 갈꽃과 메밀꽃이 만발한 짧은 가을 동안 맺어지고 풀어져 무슨 숙명적인 기분마저 난다. 순원이 묘사한 가을속 마을 풍경은 한폭의 수채화 같은데 그가 쓰는 우리말이 원시적이다시피 순수하고 고와 ‘소나기’는 한 권의 아름다운 시화첩이라고 하겠다.

글은 또 그리움도 간절히 적고 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이 조약돌은 소녀가 자기를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는 소년에게 “이 바보”하면서 날려보낸 것인데(소녀가 소년에게 먼저 관계의 제스처를 보낸 것을 보면 확실히 소녀가 소년보다 어른스럽다.) 소녀의 감촉이 묻은 조약돌을 주무르는 행위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애무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움은 또 이렇게도 묘사된다.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운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나이 소년 또래였을 때 내가 느꼈던 야릇한 성적 감각을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동요를 부르면서였다.

‘퐁당퐁당 돌을 던져라 누나 몰래 돌을 던져라 냇물아 퍼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배추를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지러 주어라.’우리 누나 손등을 간지러 주어라는 대목에서 어린 나는 약간 몸이 뒤틀리는 이성에 대한 간지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가을 대기처럼 맑으면서 쓸쓸하고 또 정열적인 ‘소나기’는 소년이 잠결에 들은 말로 끝난다.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든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소녀는 소나기 뒤 소년의 등에 업혔을 때 자기 스웨터 앞자락에 든 검붉은 진흙물 흔적을 가지고 죽은 것이다. 이보다 더 간절한 러브 스토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소나기’는 강요애가 곱게 삽화를 그린 책(길벗어린이)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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