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없이 걷는 행인들

2000-09-21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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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기행(8)

호텔 근처의 아파트 단지엔 최근에 지은 말쑥한 아파트와 낡아서 수리가 필요한 옛 아파트들이 섞여 있었다. 오후 2시경이었는데 밖에 나와있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청년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추측컨 데 열악한 전기사정으로 냉방장치가 안된 아파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밖에 나와 움직이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다. 노인들도 보였는데 아마도 이들은 자녀들에게 방을 비워주려고 나온 게 아닌가 생각됐다. 한 방에서 3대가 같이 사는 사정이니 사려 깊은 노인들이 방을 비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주마등같이 본 평양시민의 겉모습을 요약하면 우선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말이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길가에서 두서너명 씩 서거나 앉아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딘지 갈 길이 바빠 모두가 서둘러 발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평양시민들이 입은 옷은 매우 평범하고 단조로웠다. 서울거리에서 보는 옷 잘입은 사람들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특히 여자들의 옷은 한복을 제외하고는 초라했다.

행인들은 대체로 피부색이 검고 여위어 보였다.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노동을 한다. 여름에 뜨거운 햇빛 아래 일 하다보면 살결이 검게 탈 수 있고 살이 빠질 수도 있다. 서울에서와 같이 뚱뚱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대조적이었다.

평양거리, 특히 호텔 주변엔 상점이 거의 없었다. 어디에나 상점이 즐비한 서울 도심과 판이하게 달랐다. 호텔 바로 건너편에 능라식당이 있었지만 문을 닫은 것 같았고 다른 식품가게도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약 한시간 후 호텔에 돌아와 로비에서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동료 투숙객인 이선생이 내려왔는데 그는 평양에 있는 가족을 오늘 못 만날 것 같다며 안절부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선생은 토요일에 일찍 평양을 떠나야한다.

오늘은 일행이 호텔 44층에 있는 회전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 회식에는 안내원인 이선생도 동석했는데 우족탕이 22원(미화 11달러), 대동강 숭어탕이 20원으로 퍽 비쌌지만 음식은 맛이 있었다. 저녁 후 안내원에게 평양의 밤 구경을 가자고 졸라댔다. 그는 밤에 할 구경거리가 별로 없다며 방에서 쉬라고 권했다. 김선생 부부는 방으로 올라갔지만 이선생과 나는 계속 졸라댔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호텔에서 약 10분 거리인 민족식당에서 음악연주회가 있다며 그거라도 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식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음악회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때가 밤 9시경이었다. 할 수없이 발길을 돌려 호텔로 오며 그런대로 평양의 밤 거리를 구경했다. 가로등이 있었지만 불이 켜있지 않아 어둠침침했고 아파트 단지 내도 불이 거의 켜있지 않았다. 거리에 상점이 없으니 불을 밝혀 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밤 9시경인데도 행인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도 말없이 어디론지 발길을 재촉하면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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