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 이주하는 인구수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민주주의 체제로 분류되는 국가의 비율 또한 높아졌다. 하지만 최근 민주주의 퇴보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V-Dem 연구소가 1900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680건의 체제 변화 사례를 추적한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한 해에만 무려 42개국이 권위주의(독재)체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자들은 또한 1990년대 초 이후 민주주의의 회복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전례 없는 36개의 민주주의 체제 붕괴를 지적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우월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안에 벌써 약화되고 쇠퇴하고 있다면, 이것이 불안정한 민주시스템의 문제인지? 아니면 선출된 지도자의 통치 방식의 문제인지? 반드시 원인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 민주주의는 수년간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해오며 곤두박질 치고 있다. 상황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더 이상 한두 번의 선거 결과로 가려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명백히 만성적인 문제로 그 여파가 장기적인 위험을 가리고 있다. 존 롤스, 토머스 스캔론 등이 제시한 ‘정의론’과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의 장’ 틀은 민주주의 보안 제도로 저명한 정치 철학자들이 이미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폐쇄적인 이념적 메아리방에 갇혀 살고 있어 민주적 다수결 원칙으로는 타협의 실마리를 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지금 미국은 민주적 비전을 필요로 한다. 미국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바이블로 여기는 소설이 있다. 관료주의에 찌든 국가를 그린 Ayn Rand의 1957년 소설로 디스토피아적 이야기로 가득 찬 ‘Atlas Shrugged’이다. 이 소설을 롤 모델로 삼아, 최근 몇 년 동안 실리콘 밸리의 기술 엘리트들 사이에서 흥미로우면서도 다소 불안감을 자아내는 추세가 감지 되고 있다. 바로 전통적인 통치 방식을 재고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Peter Thiel, Elon Musk, Balaji Srinivasan과 같은 실리콘 밸리의 수퍼 리치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이 쇠퇴하고 있으며, 해결책은 개혁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재구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영향력 인사는, 오랫동안 다문화주의와 진보적인 정치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고, 진보·합리주의·민주적 통치라는 계몽주의 이상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피터 틸이다. 실리콘 밸리의 빅 투자자인 그는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디지털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해 기술 관료주의 통치를 위한 글로벌 정치적 혁신을 구상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비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Curtis Yarvin은 전통적인 정부를 기업이 운영하는 소규모 자치령으로 대체하는 시스템인 ‘Patchwork’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이러한 패치들은 여론보다 효율성을 우선시하고 생체인식 감시와 같은 기술을 통해 사회 질서의 통제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피터 틸은 정치가 느리고 비효율적인 반면, 기술은 다수의 동의를 얻을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정치 시스템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Praxis Project’라고 밝혔다. Dryden Brown이 주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피터 틸로 부터 강력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으며, 네트워크 국가, 암호화폐 기반 사회, AI·바이오 기술 분야 선구자들을 위한 심지어 민간이 통치하는 지중해 지역의 거점 해양 도시(seasteading)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모든 개인을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취급하는 추상적인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반평등주의적 원칙을 강조한다. 또한, 진정한 기술 혁신을 위해서는 행정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 관료주의와 영웅적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고 생각한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 종말론과 인문학의 ‘새로운 다윈’이라 불리는 René Girard의 모방 이론, 그리고 기술 결정론의 새로운 정치 질서의 결합을 포함한다. 한마디로 선출된 지도자가 아닌 테크노 엘리트가 통치하는 기술 유토피아적 국가를 구상하고 있다. 꽤나 섬뜩한 아이디어들이다.
어찌 보면 최악의 통치 체제(kakistocracy)를 불러 올 수도 있다. 이러한 계획들은 종종 자유와 혁신을 촉진하는 것으로 포장되지만, 비평가들은 이러한 계획들이 기술 독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언론인들이 ‘테크노 파시즘' 이라고 부르는 티엘의 철학은 파시즘을 모순의 벌집이자 다양한 철학적·정치적 이념의 콜라주라고 묘사한 철학자 Umberto Eco를 떠올리게 한다.
필자는 그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해롭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사상은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혁신에 기대가 크다. “기술이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의 ‘기술 결정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 섞인 희망 때문이다. 세상은 종종 괴팍함을 천재성으로 바꾸고, 어리석은 사람을 혁신가로 만든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 그들이 어리석은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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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국 정치 철학자,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