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목요 에세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2026-05-28 (목) 10:02:59 백향민/영어음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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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말채찍을 말아 들고 역마차는 달려간다. 저 멀리 인디언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 너머 주막집에 아가씨가 그리워 달려라, 역마야 아리조나 카이보이⋯”

1950년대에서 60년대 유행했던 가요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의 노랫말의 배경은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먼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또 동경한다. 한국에서 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던 시절 이러한 노래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외국의 정서를 느끼게 되었다.

아메리칸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홍콩 아가씨, 페르샤 공주등은 모두 외국에 대에 감정을 노래를 통하여 표현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 된 외국 중에서 미국은 단연 제일의 나라였다.


이렇게 된 배경은 영화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당시 영화는 일반인에게 접촉 가능한 외국으로의 통로였다. 영화 속에 비추어진 미국은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더욱 확대되어 하나의 이상향이 되기도 하였고 이러한 감정은 노래를 통하여 사람들의 가슴속에 진하게 자리했다.

예전에 우리가 서부영화라고 불렀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주인공들은 전후의 좌절 내지 허무감에 젖어있던 한국인들에게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당시 말과 함께 생활하는 개척민들을 “카우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카우보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룬 후 동북부지방에서의 육류용 소의 수요가 급증하여 텍사스의 목장 주들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들 목장 주들은 수천 마리의 소 떼들을 목장에서 기차역이 있는 도시까지 이동시키는 목동들이 필요했다.

한편 수개월이 걸리기도 하는 소 떼를 모는 일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들, 목동들이 오리지널 “카우보이”였다. 이들, 카우보이들은 1860년 후반 철조망의 발명과 기차선로가 목장 지역까지 연장되면서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들 원조 카우보이는 겨우 20년 정도 활동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나아가 개척정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목동들을 카우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카우보이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한다.

카우보이들의 활동 지역이던 이러한 목장은 텍사스가 원조였다. 그 후 소들이 북쪽의 낮은 평원지역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것을 알게 된 목장 주들은 소 떼를 현재의 몬나타, 와이오밍, 콜로라도, 다코다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아리조나는 목장도 카우보이의 활동 지역도 아니었다. “아리조나 카우보이”는 요즘 흔히 쓰는 말로 Fact와 거리가 멀었다. 작사자의 의도는 알 수 없다. 아마 텍사스 카우보이는 너무 흔하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모른다.

무언가 새로운 맛을 주기 위해 다른 이름을 찾았지만 정보가 충분하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단순히 아리조나가 신선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다.

역사가 아닌 추억은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추억이다. 그것이 아리조나 카우보이가 아리조나 카우보이로 계속 남아야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백향민/영어음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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