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 고]두 조국 사이에서 배우는 책임과 사랑

2026-05-28 (목) 10:00:14 노재화/전성결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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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와 이어서 6월 6일 대한민국의 현충일이 찾아온다. 나는 해마다 이 계절이 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미국의 성조기와 한국의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한 인간이 두 나라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한때는 조국을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으로만 이해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는 국경을 넘어 살아가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며, 두 문화와 두 언어 사이에서 정체성을 형성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미국이라는 땅에서 또 다른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메모리얼 데이와 현충일은 단순한 국가기념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영혼의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자라던 시대의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기억이 깊게 남아 있고, 결코 풍요롭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도 나라를 사랑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학교 운동장 조회 시간에 울려 퍼지던 애국가, 현충일마다 울리던 사이렌 소리, 그리고 호국영령을 기리는 묵념은 어린 마음속에 국가라는 공동체의 의미를 깊게 새겨 놓았다. 특히 군 복무 시절은 내게 애국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배우게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서 미국에 왔을 때는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웠다.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이민자는 언제나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완전히 미국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한국 안에만 머물 수도 없다.

때로는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을 경험하기도 했다. 현실속에서는 영어 때문에 위축되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나이가 들어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노인들, 정체성 혼란 속에 살아가는 2세와 3세들까지... 이민사회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고독과 상처가 상존하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눈물을 보아 왔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디아스포라인 우리는 두 나라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 뿐아니라 두 나라를 연결하는 평화의 다리가 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나를 낳아 길러준 조국이며, 미국은 인생의 중·후반을 품어 준 삶의 터전이다. 한국은 나의 뿌리이고, 미국은 나와 자녀들의 현재와 미래가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다.

두 나라는 서로 경쟁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 삶 안에서 함께 공존하는 두 개의 은혜로운 공간이며, 우리는 한국 사회와 디아스포라로서 미국 사회 양쪽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나라를 위해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
메모리얼 데이는 미국을 위해 희생한 군인들을 기리는 날이다. 공동묘지에 꽂힌 작은 성조기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 거대한 나라가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졌음을 생각하게 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공짜로나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과 죽음위에 세워진 것이다. 해한민국의 현충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만약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국가의 자유와 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기념일 사이에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나는 이 두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권리에는 익숙하지만 책임에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는 권리와 책임이 함께 갈 때 유지된다.

조국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매일 만들어 지는 공동체의 얼굴이다. 특히 디아스포라인 우리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애국은 반드시 총을 드는 것만이 아니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도 애국이고, 다음 세대를 바르게 교육하는 것도 애국이다.

이민사회안에서 가난한 자를 돕고, 소외된 자에게 희망을 주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시민이 되는 것도 역시 애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노재화/전성결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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