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단상] 사자의 죽음
2026-05-15 (금) 12:00:00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하늘에 독수리가 있다면 땅에는 사자가 있다. 사자는 왕권, 용기 그리고 권위를 상징한다. 사자상이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국사의 상징으로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다. 영국은 왕실의 문장으로, 네덜란드는 국장으로, 스리랑카에서는 국기로, 잠비아,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에서는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자의 우렁찬 포효, 압도적이고 위엄스러운 걸음 그리고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때문이다.
스위스 중부에 있는 루체른 구시가지 가까이에서 한 마리의 사자가 죽어가고 있다. 가슴에 창으로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 사자상(L?wendenkmal)이 그것이다. 눈은 감기고 왼쪽 앞발은 힘없이 쳐진 상태이지만 오른쪽 앞발로는 프랑스 왕가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와 스위스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를 꼭 잡고 있다. 깎아 지른 듯한 암벽에 조각된 이 사자상은 길이가 약 10미터나 된다. 이 한 마리 쓰러진 사자를 보기 위해 매년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이 사자상 위에는 다음과 같이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다.
‘스위스인의 신뢰(충성)와 용기’(Helvetiorum Fidei ac Virtuti)
이 사자상은 프랑스 혁명 때 스위스 용병들이 끝까지 왕가를 지켰던 용맹과 충성을 상징한다. 1792년 8월 10일 무장 군이 튀일리 궁전을 공격했다. 궁전을 지키고 있던 스위스 근위대 760명은 자신들의 힘으로 반란군을 막아 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왕궁을 지키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훗날 이들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 이 사자상(L?wendenkmal)이다.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이 설계하고, 스위스 출신 석공 루카스 아호른(Lukas Ahorn)이 1820?1821년에 직접 암벽에 새겨 완성했다.
용병의 신분이었지만 그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전사한 역사를 사자의 죽음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다 생명을 잃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 조직 중 하나이며 가장 작은 군대 조직으로 알려진 것은 로마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병 부대이다. 교황과 바티칸을 보호하는 공식적인 군사·경호 부대이다. 총 135명으로 구성된 이 근위병은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하여 1506년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조직의 명칭은 ‘교황청 스위스 근위병’(Pontifical Swiss Guard)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반드시 스위스 국적이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 스위스인들에게 이 임무를 맡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의와 용맹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루체른의 사자는 포효함으로 용맹을 떨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신뢰와 용기의 가치를 남긴다. 자신은 죽음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맡은 일에 대한 충성 그리고 용맹을 가슴에 품고 삶을 마무리하는 사자는 진정한 신의와 용맹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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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