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언론인 김진을 위한 진혼사(鎭魂詞)

2026-04-21 (화) 08:10:32 정 두루미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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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지워지지 않을… 그런 신비에 가까운 충격, 슬픔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 4월 4일 늦잠에서 깨어나니 서울에서 전혀 생소한 전화가 연거푸 두 번이나 걸려와 있었다. 대답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 회신을 했다. 놀랍게도 20여 년만에 걸려온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씨의 사과 전화였다. 너무 반가워 김진과 제일 가까웠던 평생 친구 임현찬 박사(전 TV조선 사장)에게 김진과의 교신 소식을 알렸다. 임 박사도 김진과 연전부터 대화를 끊고 있었던 터라 놀라워했다.

그런데 바로 이틀 후 임현찬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진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라며 울먹였다. 정확하게 4월 10일 12시 37분 인천 대교 한 가운데에 차를 세워놓고 김진이 투신, 17분 후 해양경찰이 시신을 수습했다는 제보를 조선일보 기자들로 부터 받았다고 했다. 얼이 빠진 듯 말문이 막히고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김진, 극단적 수단으로 세상을 결별한 김진을 회억해 본다. 언제나 밤하늘에 별들을 동경하며 그 속에 꿈을 심었던 불멸의 화가, 반 고흐가 ‘갈까마귀 나르는 밀밭’을 그려놓고 얼마 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연이 문득 오버랩된다. 독특한 자세로 정론 집필 신조를 끝까지 지켰고 불의에 대응, 투쟁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진면목은 강골 보수라고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진보와도 넉넉히 대화하고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강원도 원주 출신인 김진은 1986년 중앙일보에 입사,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내가(필자 정기용) 민정당 대표위원 비서실장(윤길중 대표 보좌역 1급)에 취임하면서 김진 기자를 처음 만났다. 당시 민정당 출입은 중앙일보 문창극, 조선일보 이영덕, 동아일보 이낙연 등이 제1진이었고 김진 기자가 제2진이었으니 그의 재능이 빠르게 인정받는 추세임을 알 수 있었다.

김진은 이후 청와대를 거쳐 이미 워싱턴 특파원으로 눈부신 능력을 발휘했다. 한국 특파원 사상 최초로 당시 현역이던 부시 대통령을 단독 회견(인터뷰)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우리 정치계의 최고 거물들을 차례로 단독면담, 독대 회견기사를 적어내며 여론의 향방을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그가 쓴 ‘청와대 비서실' 기획기사 연재는 전국적으로 화제에 오르며 한발 앞서 가던 동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수작 ‘청와대 비서실'은 출간 후 5판이나 증판하는 등 전국 베스트셀러 자리를 거듭 지키기도 했다.

중앙일보를 떠난 후에도 김진은 유튜브를 운영하며 각 주요 언론매체에, 신문 방송에 출연, 활발한 정치평론을 펼쳤다.
김진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작별을 고했다시피 깊숙하게 사사로운 속 얘기까지 토로할 수 있는 호형호제의 막역한 사이였다. 따라서 김진을 만날 때마다 늘 한두 가지 아쉬움을 느꼈고 그가 떠난 후 한층 더 쓴맛이 저며온다.

재승박덕이라 할까. 김진에게 세상 속세를 아우르고 인간을 이해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언제나 외롭고 주변과 반목했다. 정치전문 기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언론계의 요직이라 불리는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에 오르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보스인 홍석현 사장에 ‘5가지 대역죄’ 내용의 성명을 적어내고, 동료 전원을 비판하여 고립무원을 자초했다.

이미 가버린 김진에게 가혹한 평가도 괴롭지만 이 세상이 다 아는 그의 특성을 오히려 반면교사 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소화한다.
중국의 사마천은 바른말 하다가 궁형(거세)을 당했고 조선때 충신 조광조는 혁신을 주장하며 동료 신하들까지 비난하는 상소를 임금께 자주 올려 오히려 동료들의 모략으로 미움을 받아 임금의 사약을 받았다.

바른 자세로 양심을 지키고 올곧게 살아가는 데에는 모략, 모험과 함께 지독한 고립, 사탄의 유혹과 협박이 반드시 따라붙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세상이다.

차가운 밤하늘 빛나는 별들과 꿈을 나누던 반 고흐와 영원한 논설위원 김진이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이 떠오른다. 재삼 그의 명복을 빈다. 삼성병원 측이 마련한 고인의 빈소에는 홍석현 회장 등이 보내온 조화 7개가 달랑 놓여 있었고 헤어져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이민 가 살던 전 부인과 1남 1녀가 분향, 울먹였다고 한다. 내가 김진에게 늘 모범 삼으라고 충고했던 그의 평생 친구 임현찬 박사가 장례절차를 돌보고 발인까지 의리를 보였다.

독특한 그와의 인연으로 마지막 대화가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571)326-6609

<정 두루미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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