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 고] ‘헌법전문’의 기준

2026-04-15 (수) 07:37:57 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크게 작게
한국에서 헌법의 일부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절차가 시작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개정안 공고에 따라 국외부재자 신고와 재외투표인 등록신청을 진행하고 있다.

헌법 전문과 계엄선포와 관련된 몇몇 조항들에 대한 개헌이 주된 내용이다. 그 개정안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헌법 전문과 관련된 내용이다. 현행 “4·19 민주이념”을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민주이념”으로 확장하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어떤 역사적 사건을 국가 헌정 질서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이 개정안은 표면적으로 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보다 풍부하게 반영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특히 1979년의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함께 포함시킨 것은 지역적으로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이른바 ‘동서 균형’을 고려한 정치적 선택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그


러나 헌법 전문은 지역적 균형이나 정치적 배려를 반영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과 헌정 질서의 기반을 선언하는 문장이다. 그렇기에 포함될 사건의 기준은 상징성이나 균형이 아니라, 체제 변동과 역사적 전환이라는 보다 엄격한 잣대여야 한다.

부마민주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사건들은 국가 권력이 시민에게 가한 폭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한국 민주주의의 도덕적 토대를 형성한 사건들이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가장 처절한 질문과 답이 이 사건들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한 사실도 존재한다. 부마민주항쟁과 5·18 이후에도 권위주의 체제는 유지되었고, 정치적 구조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다. 즉 이 사건들은 민주주의의 ‘이유’를 제공했지만, 민주주의의 ‘체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반면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항쟁은 6월 10일 전국적으로 시작된 대규모 시민 저항에서 출발하여, 학생·노동자·종교계·중산층이 함께 참여하는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이 이루어졌고, 이는 헌정 질서의 근본적 전환으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 6월 민주항쟁은 단순한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정치 체제를 실제로 출범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대통령 직선제, 정치적 경쟁 구조, 시민 참여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모두 이 항쟁의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헌법 전문의 개정 방향을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사건이 더 의미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 현재의 국가 체제를 만들어 왔는가”이다. 헌법은 단순한 기억의 저장소가 아니라, 국가의 토대를 선언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여러 사건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은 오히려 헌법 전문의 의미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지역적 균형이나 정치적 고려에 따라 사건을 선택하는 방식은 헌법을 당대 정치의 산물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오히려 보다 명확한 기준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1960년의 4·19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라는 두 축이다. 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선언한 시민혁명이었고, 6월 항쟁은 그 원리를 현실의 정치 제도로 완성한 체제 전환의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은 각각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상징하며, 대한민국 헌정 질서의 시작과 완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룬다.

따라서 헌법 전문은 “4·19혁명과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이념”이라는 형태로 정리되는 것이 더 명확하고 일관된 역사 인식을 제공할 수 있다. 이는 특정 지역이나 사건을 배제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헌법이라는 문서가 가져야 할 구조적 명확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준의 문제다.

헌법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 방향을 규정하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개헌은 당리당략이나 일시적 여론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특히 헌법 전문은 백년의 시간을 견뎌야 할 문장이다. 그 안에 담길 사건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정확할수록 강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억이 아니라, 더 분명한 기준이다. 헌법은 과거를 나열하는 문서가 아니라, 국가의 헌정 질서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분명해야 한다.

<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