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타임슬립 소재가 많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느닷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가서 현재를 바꿔놓고, 뭐가 또 잘못되어 다시 돌아가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상상을 부추긴다. 만약에 다시 돌아간다면, 너는 언제 어디로 돌아가고 싶니. 어차피 망상인 걸 알면서도 그런 질문에 나는 몸서리를 치며 손을 휘저었다. 안가! 절대 안 가! 사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물어봤더니 내 나이 여성들 대체로 그런 반응이니까. 안 살아봤으니 꾸역꾸역 이리 사는 거지, 처음부터 다시 살라면, 아이고 나는 안 갈란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서.
그래도 딱 한 장면만 슬쩍 다시 보고 온다면, 오래도 안 있고 딱 10분만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홉 살의 여름밤으로 숨어들고 싶다. 정릉 4동 노란 양옥집, 황토색 가죽 소파가 있고 조로록 앉아 있는 고만고만한 여자아이 셋, 녹색 카페트가 맨발에 보드랍게 휘감기고, 선풍기는 달달 소리를 내며 어린 것들의 더운 이마를 식혔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아빠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커다란 상자를 낑낑 매고 돌아오셨다. 셔츠가 온통 땀에 다 젖어서. 그 상자를 응접실 한가운데 놓고는 올망졸망 우리를 보고 활짝 웃었다. 우리 큰 딸 생일 선물이야! 엄청나게 큰 인형의 집이라도 들었을까 눈을 반짝이며 바짝 다가앉았다.
그것은, 시커먼 조각이었다. 귀한 검은 옥돌을 깎아 만들었다는 용 조각. 예술가가 한땀 한땀 작은 비늘까지 새겨넣었다는 신비의 용 조각. 그 자태는 곧 하늘로 승천할 기세였으나 어린 내 눈엔 그냥 못생기고 이상한 생선일 뿐이었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와앙, 내 생일 선물은! 내 생일 선물은!
아빠는 예술 수집에 진심 ‘돌은 자’셨다. 돈만 생기면 그림과 각종 미술품 들을 사오셨다. 우리 집은 흡사 박물관 같았다. 응접실에는 계절마다 각기 다른 열두 폭 병풍이 촤르륵 펼쳐졌고, 크고 작은 그림들이 잔뜩 걸렸으며, 구석구석 조각이 주인처럼 들어앉았다. 아빠는 어린 딸들을 앉혀놓고 마치 구연 동화하듯 그림 이야기를 했다. 어찌나 실감 나게 이야기를 하는지, 안데르센 동화보다 더 재밌었다. 예술은 그렇게 나의 성장 배경이 됐다.
아홉 살의 생일 밤은 서러웠다. 솔직히 어린 딸의 생일 선물로는 너무했다. 그런데 괴상한 선물에 또 한바탕 울어도 좋으니 그 여름밤의 아빠를 한 번만 다시 보고 싶다. 눈물범벅 딸에게 쩔쩔매던, 젊고 다정한 한 남자를 딱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빠, 시간이 겸제 정선 그림 속 폭포처럼 흘러갔네요. 아빠는 멀리 가셨지만, 여전히 우리 집에는 아빠가 세워둔 수호신 용 조각이 늠름해요. 꿈에 한 번 보러오세요. 확 늙어버린 딸이 놀래켜 드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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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