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은 지금⋯]

2026-04-14 (화) 07:42:44 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
크게 작게
4월은 계절의 전환기일 뿐 아니라, 역사적 비극과 결단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은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하고1865년 4월 14일 피격되어 다음 날 서거했고,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1968년 4월 4일 멤피스에서 암살됐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1960년 4·19 혁명은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승만 독재에 맞서다 희생되었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감행해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했다.

4월은 공동체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용감한 행동을 한 인물들의 목숨을 앗아간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용감함은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절제된 선택이다. 반대로 난폭함은 분노, 증오, 권력욕에 의해 통제 없이 행사되는 폭력이다. 둘은 모두 ‘강함’으로 보일 수 있지만, 기준은 동기와 책임, 그리고 결과에 있다.

공동체를 보호하고 확장하는가, 아니면 파괴하고 소모시키는가가 결정적 차이다.
역사적 비교는 이 구별을 더욱 명확히 만든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장기간 수감되었고, 이후 권력을 잡은 뒤에도 보복이 아니라 화해와 제도적 통합을 선택했다. 반면 아돌프 히틀러는 민족주의와 공포를 동원해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했다.

전자는 절제된 용기, 후자는 조직화된 난폭함이다. 이 구분은 단순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실제로 사회의 생존과 파괴를 가르는 현실적 기준이다.

사상적 전통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공자는 “용이 의를 따르지 않으면 난이 된다”고 보았고, 이는 도덕적 기준이 없는 용기가 곧 폭력으로 전환된다는 의미다. 맹자는 의를 중심에 두지 않는 행동을 ‘혈기’로 규정했다.

예수는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가르침으로 폭력의 자기파괴성을 지적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핵심은 동일하다. 용기는 절제와 정의에 종속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

용감한 지도자는 갈등을 관리하고, 난폭한 지도자는 갈등을 확대한다. 용감한 지도자는 책임을 감당하고, 난폭한 지도자는 책임을 전가한다. 용감한 지도자는 제도를 강화하고, 난폭한 지도자는 제도를 무력화한다. 용감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보호하지만, 난폭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동원하거나 희생시킨다.

오늘의 세계는 전쟁, AI 혁명, 정치적 양극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적 전환기에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결단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난폭함이 쉽게 정당화된다. 그러나 감정적 선동과 과격한 언어는 문제 해결 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통제력 부족의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유권자는 정책의 내용뿐 아니라,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과 태도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특히 미국 사회의 한인 유권자들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여러 지역에서 투표와 여론 형성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특정 종교, 이념, 그리고 진영에 대한 무비판적 충성에 대한 경계. 둘째, 다양한 정보를 통해 사실을 교차 검증하는 습관. 셋째, 단기적 분노가 아니라 장기적 공동체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태도다.

결국 핵심은 단순하다. 용감함은 공동체를 위한 절제된 힘이고, 난폭함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통제되지 않은 힘이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회는 강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인 지도자에게 권력을 위임하게 된다. 반대로 이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시민은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하고, 위기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정확한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출발점은, 용감함과 난폭함을 구별하는 기준을 분명히 세우는 데 있다.

<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