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안녕, 샘터

2026-02-11 (수) 08:01:42 나혜경/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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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샘터 잡지가 2026년 1월호를 끝으로 사실상 폐간한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사실 샘터가 아직까지 실존했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나의 추억 속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샘터가 경영난과 시대 흐름에 따라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으며 이는 폐간을 의미한다고 했다. 내 나이 또래라면 다들 기억하는 아주 오래된, 55년의 역사를 이어온 샘터라는 잡지는 일상적인 따뜻함을 소재로 엮은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에 담임선생님도 샘터의 독자였다. 정은숙 선생님은 교대를 막 졸업하시고 우리학교에 부임하셨다. 긴 생머리와 흰 피부와 따뜻한 미소를 장착하시고 학생들을 대하셨던 젊은 여자분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나는 가슴이 설레다못해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희열을 느끼며 열심히 선생님의 지도를 따랐던 것 같다. 선생님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며 마음에 들기 위하여 무지하게 노력했었다.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부류에 속했던 나이었기에 어떻게든지 발군의 실력을 갖추어 선생님이 나를 좀 예뻐해주시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었을 것이다.


가끔은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나서 오후에 몇몇의 친구들하고 같이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사시는 선생님 댁에 초대를 받아 놀러간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 댁은 적산가옥이었던 듯, 잘 가꿔진 정원과 긴 복도와 아담하고 단정한 방들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선생님이 차려주시는 밥을 먹었으며 라면땅이나 새우깡, 눈깔사탕이나 풍선껌 등 주전부리를 먹으며 놀았겠지.

나는 이른바 선생님께 뽑혀 어엿이 “예쁨”을 받는, 말하자면 teacher”s pet 이거나 귀염둥이가 된 것 같은 안도감과 자긍심에 들떠버렸다. 선생님은 교사 첫 해에 만난 학생들을 귀히 여기시고 아껴주셨으며 자애롭고 따뜻하게 훈육하신 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백지를 나눠주시며 거기에 자기의 소원을 하나씩 써보라고 하셨다. 그때 내가 뭐라고 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지극히 현실적이고 제한적인, 진짜 소원하는 것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예컨대 “몸이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공부를 잘하고 싶어요.” 라든가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선생님께서 우리 몇몇의 이름과 소원의 글이 실린 샘터 잡지를 보여주셨다. 내 이름이 거기 있었다. 나의 소원은 “나는 노오란 은행나무가 되고 싶어요.” 로 시작하여 가을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샛노란 은행나무가 되어 길목에서 물들고 싶다는 설명으로 끝을 맺었다.

선생님이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인 수사를 동원한 그럴 듯하고 멋진 문장으로 잡지사에 응모를 하셨던 것이다. 노오란 은행나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선생님의 소원이었을까? 아니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혼자 가만히 있는 아이에게 가을날 은행나무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싶으셨을까?

선생님은 샘터 잡지와 원고지 한 묶음을 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예쁨”을 받고 있다는 뿌듯함에 한껏 의기양양해지려는 어깨를 애써 누르며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원고지를 메꿔가겠다고 결심하였다. 하지만 원고지를 선물하신 선생님의 기대에는 끝내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샘터의 애독자이셨던 나의 선생님이 생존해계시다면 샘터 폐간 소식에 매우 애석해하실 것이 틀림없다.
삶의 행태와 양상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종이 잡지가 재정난과 경영난을 이기고 살아남을 확률은 미약하다.

서민들의 살아가는 소박한 이야기를 소재로 잔잔한 여운과 감동을 선사했던 우리시대의 잡지도 변화무쌍한 21세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아직도 내 마음 속의 샘터는 추억의 물 한 바가지 길어올리기에 충분하게 넘실댄다.

<나혜경/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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