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 일 자체가 살짝 귀찮아졌다. 더군다나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는 몸이 되면서, 영화관에 두 시간 넘게 꼼짝없이 앉아 영화를 보는 일은 예전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스럽게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대홍수. 제목만 보면, 단순한 재난 영화 같지만, 이 영화는 예상과는 달리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AI 시대를 사유하는 영화였다. 대홍수라는 재난 설정이 자칫 이 영화가 AI 시대를 사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가릴 수 있으나, 재난은 설정일 뿐 그 내용은 AI 시대의 인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침 『AI와 정치철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던 터라 이 영화에 더 눈길이 갔다. 책의 서문은 AI 기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하나는 AI의 순기능과 긍정적 가능성에 주목하며, 인간이 질병과 죽음 같은 근본적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유토피아적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AI의 역기능을 강조하며, AI가 인간의 영역을 잠식하고 결국 인간을 통제하거나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관점이다. 저자는 이 두 관점 모두의 위험을 지적한다. 낙관은 위험을 외면할 수 있고, 비관은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진화, 2025).
영화 속에서는 소행성 충돌로 인해 지구에 대홍수의 재난이 닥치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이 재난이 닥친 시점은 이미 AI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시대다. 다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AI에 ‘감성 지능’이 장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인간의 감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AI의 시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갈등을 따라간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포착한 인간 감성의 정점이 ‘모성애’라는 사실이다.
『AI와 정치철학』의 ‘AI와 인간의 활동’ 장에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활동 개념을 불러온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적 활동이고, 작업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세계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며,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활동이다. 특별히 행위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타인의 인정과 응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저자의 말처럼, “타인과의 감정을 교류하며 소통하는 행위는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7쪽).
AI의 최종 목표는 인간의 감성 지능을 장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AI는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AI는 결국 인간의 감정을 모방한 ‘인공감정’을 장착하려고 할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포착한 인간 감정의 정점이 ‘모성애’라는 것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공감정’ 논의에 하나의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AI가 ‘인공감정’을 장착하게 되면, 아렌트가 말한 ‘행위’(action) 또한 AI가 수행할 수 있는 활동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가진 고유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AI는 인간보다 노동을 더 잘 할 것이고, AI는 인간보다 작업을 더 잘 할 것이며, AI는 결국 인간보다 행위를 잘 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는 AI에 대한 두 관점 중 어느 하나에 쉽게 서지 않는다. 다만 재난이라는 디스토피아적 현실 속에서도 인류를 구원하는 서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가능성 쪽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AI가 ‘인공감정’을 장착하고 나면, ‘인공영성’을 장착하려 들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미래의 목회는 인간들을 위한 목회를 넘어 AI를 위한 목회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그렇게 되면, 아마도, AI는 인간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까. AI는 인간보다 노동, 작업, 행위를 훨씬 더 잘하니까. 기묘한 세상이 오고 있다.